‘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인천 중구 전동 제물포고등학교 본관에 크지 않지만 뚜렷하게 쓰여진 교훈이 있었다. 3일 오전 이 학교 복도에서 만난 1학년 전민제(17)군은 수능 부정행위에 대해 묻자 대뜸 "조금 나은 대학 가려고 양심까지 속이며 커닝하는 형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린(18·2년)군은 "커닝했다간 왕따 당하기 때문에 감독 선생님보다 함께 시험을 치르는 친구들이 더 두렵다"고 말했다.수능 부정행위에 대한 경찰수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일선 학교에서는 "혹시 우리 학교 학생도 연루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제물포고 학생과 교사들은 시종일관 여유 있는 표정이다. 이 학교가 1956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무감독 시험’ 때문. 고(故) 길영희 초대 교장 때부터 제물포고 학생들은 시험을 칠 때마다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는 구호를 외친 뒤 감독교사 없이 시험을 치르고, 시험 후에는 설문조사지와 소감문을 제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라 부정행위가 확인되는 학생은 해당 과목이 ‘0’점 처리되고, 벌칙으로 교내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50년이 다 돼가는 전통의 제도지만 고비도 적지 않았다. 72년 고교평준화와 80년대 말 내신성적 비중이 높아지면서 "‘뺑뺑이(무시험 고교진학생 속칭)’가 입학했는데 어떻게 믿느냐. 커닝으로 내신 올리는 것 아니냐" 등의 우려가 교내에서 나왔다.
동문들과 학부모들도 걱정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학생회장단이 교장실에 찾아와 "선배들보다 학교성적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양심만은 뒤질 수 없다"며 제도 유지를 요구했고, 주변에서도 힘을 실어 줬다.
추연화(61) 교장은 "10년간 적발된 커닝 건수가 6건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학생과 교사 모두 무감독시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학교 시험에서 교사가 없어도 커닝을 하지 않는데 수능 커닝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추 교장은 수능 부정행위 사태에 대해 "학력만을 중시 하는 사회풍토가 어린 학생을 범죄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것 같다"며 "대학에서 고등학교를 학력순으로 서열화 하기 보다 인성교육에 신경 쓰는 학교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를 고려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원(36) 교사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른의 습성을 아이들이 그대로 답습했다"고 지적했다.
무감독시험으로 교사와 학생간 신뢰도 깊어졌다. 2학년 백민기(18)군은 "선생님이 우리를 믿고 맡기시니 오히려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소희(27) 교사도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 ‘너 자신에게 떳떳하라’는 말만 하면 학생들이 알아서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며 "친구들 사이에서도 믿음이 싹터 서로 다투는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인천=안형영 기자 ahn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