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의 교육관은 전혀 엄격하지 않았다. 가끔 일과를 걸러도 아무 말씀 하지 않았다. 그날 배운 내용을 다 외워 이튿날 아침에 암송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흔히 옛날 서당에서는 배운 걸 외우지 못하면 목침 위에 올라 종아리를 맞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맞아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교육 방침도 야단스러운 게 없었다. 큰 선비 또는 도덕군자가 되라든가 문장 명필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큰 뜻을 품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다. 할아버지는 선비로서 인생을 달관한 어른이었지만 손자 교육에는 요즘 말로 ‘자율’을 중시한 것 같다.
대신 내게 언제나 "반듯한 인격으로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실제 있었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내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인격이 갖추어지기를 바랬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들에게 공손한 사람들과 우리 조상들의 얘기도 많이 들려 주었다.
그 중 이런 얘기가 있다. 국가에서는 500년의 역사를 지닌 시골 우리집을 주요 민속문화재로 지정했다.
우리집은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옛날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이 우리 집엔 없다. 안 사람이 거처하는 정침의 큰 마루에도 앙토를 바르지 않았다. 집을 지을 때는 석가래 위에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고 기와를 얹어 바깥 모양을 완성한 다음 방 안쪽으로 천정의 흙을 바르는데 이 흙이 앙토다. 이를 두고 할아버지는 "우리 조상은 힘이 있다 해서 그 힘을 다 쓰지 않고 여유를 두며 살았다. 재물이 있다고 해서 과시하지 않고 검소해야 한다는 교훈을 자손들에게 일깨워주는 예"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지고 밑지는 게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도리"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가르침은 나의 생활 철학으로 뿌리를 내렸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 주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으로 흘려버린다. 요새 사람들은 으레 경쟁력을 길러 남한테 이겨야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는 식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듣고 자란 젊은이들은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절대 남에게 손해보지 않으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남보다 먼저 승진해 출세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나름대로 현대식 해석을 붙여 보았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혼자서는 되는 일이 없다. 다른 사람과 협동해야 하는데 남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스스로 베풀 줄 알아야 한다. 그 때 그 때 짧은 시간으로 보면 손해가 될 지 모르나 한 평생을 놓고 보면 그게 가장 현명한 처사라는 걸 깨우쳐 줘야 한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우리집 만의 특유한 자랑이 아니었다. 당시 이웃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나의 처가는 퇴계 이황 선생의 종가인데 그 집의 교육 방법도 우리와 비슷했다.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스스로 깨달아 공부를 하게 했다. 집안 분위기나 문화적인 배경 때문에 늦고 빠른 차이는 있으나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 공부를 해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 특출한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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