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농사를 마치고 부산에서 결혼해 살고있는 딸 집을 찾았다. 모처럼의 소중하고 애틋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일흔 셋. 한국전쟁의 포성이 채 멎지 않았을 때 입대, 5년3개월을 강원 화천의 백암산에서 근무했다. 당시 나는 소대 연락병이었고, 그는 두살 위 선임하사였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그는 다른 고참들과는 달랐다. 졸병이라고 함부로 욕하고 때리는 법이 없었다. 겨우 “꺽껭이(지렁이) 똥구멍 같은 놈아”가 욕이라면 욕이었다. 제대 후에도 전우들이 보고 싶다며 그 먼 부대까지 면회를 오기도 했다.
마산에서 차를 내려 창녕행 버스를 탔다. 오십년 전 그의 주소가 어렴풋이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을까? 마을 앞 노인들에게 그의 이름을 댔더니 “노인 회장”이라고 했다. 안도감과 함께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이 밀려왔다. 노인들의 안내로 그의 집을 찾았다.
방에 들어서니 벽에 수많은 훈장들이 걸려 있었다. 순간, 나는 벽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오십년 전 군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 두 노병은 부둥켜안으며 눈시울을 붉혔고, 지켜보던 부인도 눈물을 보였다.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그 어렵던 시절의 전우애가 뼈 속 깊이 저려왔다. 용케도 그는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우리는 잔을 들며 마음의 정을 나눈 뒤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서로의 건강을 빌며 헤어졌다.
불편한 그의 한쪽 다리에 마음이 아팠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작별에 낙엽처럼 쓸쓸해졌다.
이병우ㆍ전북 남원시 고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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