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12월2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1세)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3세라는 이름으로 제위(帝位)에 오름으로써 프랑스 제2제정이 출범했다. 백부가 공화국의 최고지도자였다가 제정을 선포했듯, 루이 보나파르트도 공화국의 최고지도자였다가 제정을 선포했다. 황제가 되기 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혁명으로 수립된 제1공화국의 제1통령이었고, 황제가 되기 전의 루이 보나파르트는 1848년 2월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결정적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를 쿠데타에서 찾았다는 점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공화주의의 자식이었지만, 이내 그 뿌리를 부정하고 배신한 셈이다.보나파르티슴이라 불리게 될 전제주의에 이끌린 제2제정은 시민적 자유가 억압된 시기였던 동시에, 프랑스 부르주아사회가 찬란한 번영을 목격한 시기이기도 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고 인도차이나와 아프리카의 식민화가 진척되면서 프랑스의 위세는 크게 신장했다. 자연주의 문학과 인상파 회화는 파리를 여전히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지탱하고 있었고, 부르주아지의 흥왕(興旺)에 맞선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했다. 아메리카합중국이 인류 역사의 최전선으로 나오기 전이었던 터라, 제2제정기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세계 최강대국이라 할 만했다.
프랑스 제1제정이 단 한 사람의 황제와 운명을 같이했듯, 제2제정 역시 나폴레옹3세와 운명을 같이했다. 크림전쟁 승리, 청나라 출병, 이탈리아통일전쟁 간섭 등으로 콧대가 한껏 높아진 나폴레옹3세는 멕시코 원정에서 쓴 맛을 보며 제국의 위신을 실추시킨 데 이어,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말려들어 프로이센과 전쟁에 돌입함으로써 자신과 제국의 명을 재촉했다. 1870년 9월 나폴레옹3세가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포로가 됨으로써 프랑스 제2제정도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3세는 그 뒤 영국으로 망명해 그 곳에서 죽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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