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친구의 파리 전시회를 보러 온 김에 모로코의 탕헤르에 들렀다. 아프리카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자리잡은 항구도시다. 7세기 말 이래 수백년 동안 사라센제국 영토였으나, 전략적 가치 때문에 15세기 말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된 곳이다.15세기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남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이 이슬람적 과거에 기독교적 현재가 포개진 잡거공간이라면, 해협 건너 탕헤르는 제국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짓밟힌 몇 세기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압도적으로 이슬람 공간이었다. 라마단 기간이어서 음식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대낮의 굶주림을 실천하는 이슬람인들의 신심에 감동하면서도, 새삼 종교에 대해 딴죽을 걸고 싶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긴 하지만, 실상 인류는 거의 전 역사에서 종교를 죽임과 죽음의 구실로 남용해 왔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사랑의 윤리에도 불구하고, 피로 얼룩진 죽임과 죽음의 역사, 증오의 역사였다. 그것은 모든 일신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기도 하다. 일신교의 신은 질투하는 신이니 말이다.
상대적 관용성을 역사 속에서 실천해온 이슬람교도들 역시 자신의 신에게 세계를 헌정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시가 이슬람권을 상대로 벌여온 전쟁은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 거기에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서 종교는 흔히 평화와 사랑보다는 전쟁과 증오에 기여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혁명사에서 보듯, 공화정의 적이기도 했다.
미디어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가 미국은 공화정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의 하나는 그 나라의 유사 신정국가적 성격에 있었다. 그는 취임 선서 때 프랑스 대통령이 공화주의 헌법에 기대는데 비해 미국 대통령은 성서에 손을 얹는 사실을 지적했다.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종교관이 이런 유사 신정 분위기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미국 학자가 21세기를 문명충돌의 세기로 내다봤을 때, 그 문명들은 결국 종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교나 신심은 흔히 증오와 전쟁의 연료이고, 잘해봐야 상호 무관심 속에서 실천되는 고립의 연료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라는 사회제도의 보편성은 종교적 열정이 애초부터 인간의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나약함과 관련 있는 것이겠지만, 그 나약함이 한 순간의 결단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종교를 되도록 우리 내면에 가두고 그것이 세속세계에 영향을 덜 끼치도록 애쓰는 것일 터이다. 핵심은 세속적 삶의 역학에 종교를 이용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 것은 직업적 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속인들도 함께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정치인들은 제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는 이성의 규칙에 따라 운영돼야 할 세속사회를 탈이성의 영역에 갖다 바치는 퇴행적 악습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로 예수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를 세속에 개입시키지 않는 세속주의였을지도 모른다. 종교를 지니고 종교의식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자연스러운 일부지만, 문명의 건설과정은 흔히 자연스러움과의 싸움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파리에서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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