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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기획시리즈-우리시대 주인공] (22) 만화 '둘기 합창' 독고탁,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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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기획시리즈-우리시대 주인공] (22) 만화 '둘기 합창' 독고탁, 1978년

입력
2004.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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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흥정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찰제 매장을 좋아한다. 혹 흥정을 해야만 하는 자리에 가더라도, 모질지 못한 나는 늘 우물쭈물한다. 보다 못한 주인이 가격을 제시하면 난 구세주를 만난 양 돈을 치르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온다.그게 끝이 아니다. "이게 얼마짜린데, 내가 깎아서…" 승전보 전하듯 의기양양한 나를 향해 마누라는 혀를 차기 일쑤다. 마누라는 나를 경제적으로는 무능하다고까지야 말하진 않지만, 생활경제 영역에서는 여전히 어린애라는 확신을 품고 있다. 나도 수긍한다. 나는 내가 싫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한다. 그 악역을 누군가가 대신 맡아주기를 기다리거나 주변 사람에게 부탁한다.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야 할 경우에도 말을 꺼내기 전에 상대방의 반응부터 걱정하는 나는 비굴한 웃음부터 짓게 된다. 제3자가 본다면 누가 따지고 누가 따짐을 당하는 것인지 헷갈릴 법한 그런 장면의 연출이 끝난 뒤, 나는 나의 가식의 웃음을, 위선을 되돌아보며 자책한다. 나는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다.

누구는 자신을 키운 8할을 바람이라고 했고, 누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지만, 나를 키운 8할은 ‘가난’이었다. 그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닌 상대적인 가난, 내면화한 가난이었다. 내게는 위로 아버지가 계셨고, 다 큰 형과 누나들이 있었으니, 내가 생계를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가난 자체보다 가난을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 그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나의 내면이 가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나의 내면은 가난하다. 그 가난을 극복할 수 없는 내가, 나는 싫다.

2004년 서른 네 살이 된 나 독고탁은 3남 2녀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퇴직 후 택시운전으로, 아래 위 스무 살 가까운 터울의 남매를 건사하셨다.

유년의 나는 행복했다. 그 시절 어느 집이나 형제 너덧은 예사였고, 형제들은 어디서나 든든한 배경이었고, 방패막이었다. 사장님 자가용차를 몰면서도 가족 앞에서는 항상 우람하셨던 아버지, 다리를 절지만 엄마처럼 따뜻하고 세상에서 제일 예뻤던 큰 누나, 당대 최고들만 도전하던 고등고시 준비생 큰 형, 소설 쓴답시고 가족들을 피곤하게 할 때가 있었지만 글 잘 쓰고 공부 잘하던 작은 누나, 그리고 병으로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떠난 작은 형. 작은 형은 무뚝뚝했지만 싸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고, 나는 그 형을 우리 식구 가운데 가장 든든하고 자랑스러워 했던 것 같다. 무서울 것, 아쉬울 것 없던 나는 천방지축 날뛰는 까불이였지만, 나름대로 정의로웠고 조숙했다.

불행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시작됐다. 큰 형은 아버지 몰래 공부를 작파하고 공사장을 다녔고, 작은 형도 학교 대신 연탄 배달을 시작했다.

그 두 기억을 통해 나는 ‘비밀’을 배웠다. 안다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고 싶다고 울 수 없고, 우습다고 웃을 수 없고, 화난다고 마음대로 터뜨릴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참는 것이, 나를 잘 감추는 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철’ 드는 것이었고, 훗날 책에서 읽은 용어로 풀이하자면 인격의 내면화였다. 그 시절 아이들은 너나없이 그 변화에 일찍 적응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 속에 자라야 했다.

나의 유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린 근력으로 지탱하기 힘든 하중을 너무 일찍 짊어져야 했던 나의 감성은, 탄력을 잃고 바뀐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도 없고, 만성적인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까닭 없이 후회·절망감·자책감이 밀려든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직장생활, 주변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고 있지 못하다는 소외감, 자아이상에 미달한다는 자책감 등이 원인이다. 하지만 감정표현을 절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는 기계적으로 웃는 얼굴을 연출하게 만든다. 웃는 얼굴이 억압과 우울의 증상인 셈이다.’(문학판 2004년 겨울호, 김동식 ‘경제적 불황의 문화적 징후들’에서)

표정을 통해 세상이 이해하는 나와, 내가 아는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에 나는 늘 괴롭다. 감정에 철저히 솔직한 것이, 넘치기 전에 낭비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넘치도록 감정을 방치하는 것은 미숙함의 증거요, 죄악이라고 배워 온 나는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야멸차고 폭력적인 대꾸가 두려워, 나는 달라져버린 세상에 대한 나의 분노마저 속절없이 내면화 한다.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은 그 속절없는 분노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어쩌면 나의 정신적 지체는 ‘시대의 병’인 지 모른다.

독고탁! 나를 한시대의 어린 영웅으로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울지 않는 소년이던 그 시절에도, 울 수 없는 어른이 돼버린 지금도, 나는 울고 싶다"고. "그런 ‘나’는 말 없는 다수로 이 세상을 응시하고 있지만, 세상을 향해 당당히 울고, 분노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독고탁은

장편만화 ‘독고탁’은 1970년대 초 탄생해 10여년을 풍미한 우리시대 주인공이었다. 그는 고아이거나, 엄마 등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없는 결핍의 가정에서 자라지만 대체로 명랑·쾌활하고, 천진난만하다. 하지만 그의 웃음 뒤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다. 그는 수다스럽고 말썽쟁이의 어법을 즐겨 구사하지만, 그것은 위악(僞惡)의 가장(假裝)이기 쉽다.

‘비둘기 합창’은 1978년 낸 이상무씨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서 초등학교 1학년인 독고탁은 가난한 대가족의 막내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가난이 가정의 안정을 유린하지만 그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혈육의 정을, 독고탁은 어설픈 맞춤법의 일기에 옮겨놓고 있다.

권투선수가 되겠다던 작은 형은 경기 도중 쓰러져 심장판막증으로 숨진다. "엉터리 권투선수 봉구 형은 하늘나라 엄마 옆에 갔다.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나는 굉장히 많이 울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많이 안 울었다. 아마 나는 몹시 나쁜 아이라서 그럴까? 그렇지만 나는 봉구 형이 쓰던 책상이나 아령을 볼 때 막 마음이 답답해지고 울고 싶어진다. 그러나 엉엉 울었으면 시원하겠는데 찔끔찔끔 눈물만 나와서 더 답답해진다…".

격랑같은 그 해의 끝,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가족은 봉구의 묘지를 찾는다. "인생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아빠는 행복하실까? 큰형과 큰누나 작은누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봉구 형과 엄마는 행복할까? 아빠가 말씀하셨다. ‘인간은 행복하지도 또한 불행하지도 않단다’라고…나도 2학년이 되었으니 다음부터는 글씨를 깨끗이 써야겠다."

‘비둘기합창’은 2002년 4권의 단행본(바다그림판 발행)으로 묶여 나왔고, 문화관광부장관 추천도서에 선정됐다.

■이상무씨가 말하는 ‘70년대 한국 명랑만화’

"당시(70년대)의 만화가들에게는 어린이날이 있는 5월이 죽을 맛이었습니다. 3대악(惡)이다, 5대악이다 해가며 언론·방송에서 추방 성토를 하는 대상에 불량식품, 불량만화는 꼭 끼었거든요."

이상무씨는 "만화가라는 존재가 부끄럽던 그 시절에 독고탁이 탄생했다"고 했다. 당시는 출판물, 특히 만화의 경우 사전심의가 엄격했다. ‘울지 않는 소년’의 독고탁은 누나와 한 방을 쓰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며 수정을 종용 받았고, ‘비둘기 합창’에서는 작은 형 봉구의 권투장면이 "폭력적"인 만큼 두 페이지를 이어서 그리지 못하게 했다.

결혼 적령기의 누나와 열 살도 안된 동생이어도, 끼니 거리를 걱정하는 처지였어도, 남녀사이라면 반드시 각방을 쓰도록 그려야 했고, 권투든 뭐든 주먹질은 안 된다는 스포츠와 싸움이 분화되지 않았던 강박윤리적 시대였다. 해서, 당대의 많은 만화가들은 요즘 식으로 따지면 ‘카툰’으로 분류될 명랑만화로 돌파구를 찾았다. 꺼벙이(길창덕), 두심이(두심이 표류기·윤승운), 칠떡이(5학년5반 삼총사·박수동), 혁이(도깨비감투·신문수) 강가딘(김삼) 등이 그 시절을 풍미한 우리들의 주인공이었다.

독고탁은 그 시절 청소년들의 감성의 돌파구였다. 그의 만화에는 희로애락이 있었고, 가난의 서정이 있었다. "한 달 꼬박 그림을 그려도 하숙비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가난 말고는 딱히 그릴 게 없었어요." 인기도 대단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 편지가 많이 왔어요. ‘독고탁의 꿋꿋한 의지를 본받아 나도 용기를 갖고 살겠습니다’가 주류였고, 이민 간 아이도 후속 편을 보내줄 수 없느냐고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죠. 한창 때는 하루 10통 이상도 받았어요."

그런 반응들이 그에게 힘이 됐다고 한다. 그렇게 구현된 독고탁의 힘은 이 시대에도, 시간의 벽을 넘어 만화적 당대성과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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