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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IT계의 선구자 이용태 <53> 절정 오른 학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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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IT계의 선구자 이용태 <53> 절정 오른 학원사업

입력
2004.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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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원을 하면서 세운 다섯 가지 원칙만 지키면 어느 사업이든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비즈니스에서 확신을 가진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사업을 시작하고 보면 예기치 않은 이런 저런 난관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사업을 계속 해야 할 지 접어야 할 지 흔들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확신만 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용기를 내 밀고 나가 사업을 본궤도에 올려 놓을 수 있다.내가 1970년 8월 문을 연 D학원도 몇 차례 쓰러질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기에 그대로 밀고 갔다. 예상만큼 수입이 생기지 않아 3년 가까이 자금난을 겪은 게 첫번째 시련이었다. 문을 닫든지 빚을 얻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는 동업자들을 모아 놓고 "현재 학원은 추가 증자를 하거나 빚을 얻어야 한다. 나는 사업이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빚을 내기로 했다. 이 빚은 모두 내가 책임 지겠다"고 약속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남과 더불어 일할 때는 희생하고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동업자들은 나를 더욱 신뢰하게 됐고, 내가 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싹텄다. 결국 학원은 크게 성공해 장안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나는 두 번째 학원을 만들었고 89년에는 세 번째, 네 번째 학원을 차렸다. 장안의 학원가를 모두 휩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췄다. 원래 학원을 통해 부자가 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동종 업자를 쓰러뜨리고 혼자 잘 사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뒤 나는 학원 사업에 별로 열을 올리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우선 공교육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비난이 사교육 쪽으로 몰려들었다. 학원 사업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싸늘하게 변해갔다.

이 기회에 한국 교육 당국의 정책이 크게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싶다. 고액·비밀 과외가 생겨서 교육이 비뚤어지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그 잘못을 쉽게 알 수 있다. 교육 정책은 한 가지 작은 잘못 때문에 막대한 피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당국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7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당시 문교부 장관인 M씨는 재학생 학원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금지령은 이 때부터 나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다 80년 7.30 조치로 단속을 더 강화했다. 정부는 매번 고등 학생들이 학원에 나가기 때문에 학교 교육이 정상화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달았다. 어이가 없는 얘기였다. 재학생을 학원에 못 가게 하면 비밀과외로 옮겨 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자기 자식 공부를 남보다 더 잘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 부모들의 욕구는 아무도 못 말린다.

당시는 비밀과외, 고액과외라는 게 있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못한 시절이다. 대신 골목마다 블록마다 학원이라는 게 있었다. 그 학원의 등록금은 매달 버스비 보다 적어 그다지 큰 부담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족한 점이 있다든가 경쟁에서 이겨야 겠다고 생각하면 학원에 갔다. 그런데 재학생의 학원출입을 금하고 난 뒤부터 전에 없던 그룹지도와 개인지도가 사방에서 붐을 이루었다. 또 스타강사가 탄생하면서 경쟁적으로 과외비를 올리는 현상이 빚어졌다.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진 건 여기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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