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2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마무리 때 WTO 이행계획서를 "일자 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공언했던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당시 총리는 마침내 잘못이 알려져 대국민 사과를 했고 총리와 농림부 장관이 바뀌었다.최근 쌀 재협상과정에서 1차 UR 협상 때처럼 ‘부분개방과 추가양보’냐, 아예 ‘완전개방(관세화)’이냐를 두고 당국이 보이는 애매모호한 입장은 UR 때를 상기케 한다. 중국측의 과도한 요구로 정부 당국은 완전개방 방향으로 선회할 듯 하는데 그 배경이 궁금하다. 한 연구원의 가상 분석자료를 근거 삼아 쌀시장의 완전개방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려는 협상전략은 참으로 위험하다. 현재 진행 중인 ‘도하개발의제(DDA)협상’에서 관세율 상한선 등에 대한 세부 이행원칙이 아직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쌀 재협상’에서 400% 미만의 관세율로 쌀시장을 미리 완전 개방하겠다고 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 보자는 식이다.
그동안 정부는 올해 안에 쌀 재협상을 마무리짓지 않으면 "2005년부터 자동 관세화될 것"이라고 말해 왔으나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WTO 사무국에 물어봤더니 직원의 답변이 그랬다고 하는데 재판관에게 판정 결과를 미리 알아보았다는 말처럼 사리에 맞지 않다. 협상 막바지에 ‘2005년 관세화론’이 기정 사실화하는 배경이 궁금하다. 한·중 마늘협상 밀실합의 때나 다름없이 국익과 식량주권이야 어찌 됐든 한꺼번에 매를 맞고 보자는 의도가 아니길 바란다.
미국 등과 잠정 합의했다는 관세화유예(부분개방)의 경우도 기준연도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93년 UR 협상 때 적용했던 기준치(86~88년 쌀 국내 소비량)를 10년이 지난 이번 재협상에서 단 2년을 늦춘 88~90년으로 합의하고, 2015년까지 그 8~9%를 의무 수입하겠다는 것은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협상 미숙이다. 10년 단위 재협상이니까 최소 96~98년치를 기준으로 합의했어야 논리적으로 맞다. 국내 쌀 소비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88~90년 기준의 8~9%는 현 시점과 앞으로의 실제 소비량의 12~14%에 해당한다. 실제 수입량 수치가 축소되어 알려지고 있는 셈이다.
장차 관세화의 길로 전환하는 것이 국가 이익과 농민의 권익보호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라도 수입쌀에 부과할 관세상당치를 얼마로 정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UR 농업협정은 기준연도(86~88년) 기간 중 해당품목을 전혀 수입한 경험이 없는 나라의 경우 ①유사품목의 국내외 가격차이 또는 ②인접 국가의 쌀 관련 데이터를 원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중에 혹시라도 우리가 관세화를 택하게 될 경우 일본의 사례를 활용해야 한다. 일본은 99년 관세화로 전환하면서 기준연도 기간 중 태국산 싸레기쌀을 수입했던 사실에 근거, 당시의 국내외 가격차이 1,300%를 관세상당치로 계산했다. 물론 그때까지의 의무수입량 7.2%는 계속 수입한다는 조건이었다. 그중 상당량을 미국에서 들여올 것을 이면 약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결과 첫해(99년) 관세상당치는 지난 6년간의 감축률을 제한 1,100% 수준에서 완전개방했다.
사실상 일본의 관세화 조치는 말로만 완전개방이지 실제론 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협상당국은 UR 규정에 따른 일본의 사례를 원용하는 대신 396%의 턱없이 낮은 관세율을 적용할 듯 내비치고 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위험하다.
이런 의혹에 대한 협상당국의 해명과, 과오에 대한 수정의지가 선행되지 않고 개방대세론만 갖고 국민을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간의 각종 농업협상 결과와 처방이 겉돌고 국익은 국익대로 손상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정부 당국은 더 늦기 전에 쌀 재협상 내용을 전면 재검토, 재정비하기 바란다.
김성훈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경실련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