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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IT계의 선구자 이용태 <49> 학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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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IT계의 선구자 이용태 <49> 학원 설립

입력
2004.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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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사 생활은 애초 계획한 일정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농담 하나에도 학생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는 등 강의에 온 정성을 쏟았다. 대신 낮에는 내 전공인 물리학을 공부할 요량이었다. 저녁 시간에만 하루 3시간 정도 학원에서 아르바이트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삶이란 예정된 스케줄대로 움직여 지지 않았다.학원 강사로서는 성공해 나름대로 확고한 명성을 쌓았지만 미국 유학 계획은 차일피일 미루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일정 기간을 정해 학원 강사 생활을 끝내고 유학을 떠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학원을 설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65년 초로 기억한다. 학원을 세우려면 자금을 마련하고 강사를 모집하는 두 가지 일이 가장 중요했다. 자금 모집은 동업자를 선정하되 경영은 그에게 맡기는방식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장차 미국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해도 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몰랐던 터라 동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했다.

나는 문서로 계약을 맺어 권리ㆍ의무를 규정하는 것보다 말로만 약속해도절대 어기지 않을 사람을 찾았다. 성북고 교사였던 친구 김석진이 그 학교교감 H씨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나는 김석진에게 “이 사람은 말로 한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킬 사람이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김석진은 H씨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적극 추천했다. 이렇게해서 H씨와 동업을 하기로 했다.

학원의 성패는 인기 강사를 몇 명 확보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났다. 학생들은 영어는 누구, 국어는 누구 하는 식으로 유명 강사의 이름을 꿰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학원을 보고 오는 게 아니라 강사를 따라 몰려 다녔다.수학 과목에 세 명의 강사가 있다면 가장 유명한 선생에게는 1,000명이 몰리고 두 번째는 200명, 세 번째에게는 30명 정도밖에 오지 않는 게 통례였다. 그래서 유명 강사가 학원을 옮기면 수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그만큼 유명 강사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나는 직접 강사를 찾아 나섰다. 각 과목마다 가장 잘 나가는 강사를 만나한 사람씩 설득했다. 다행히 그들은 첫 만남에서 거의 모두 우리 학원으로오겠다고 약속했다. 국어 선생만은 두 번 만나 설득을 하고서야 응낙했다. 내가 학원 강사를 하면서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어의 정 철, 독일어의 안사균, 사회생활의 선우형순, 영어의 박찬세 등은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명강사였다. 수학은 물론 내가 맡았다.

이렇게 출발한 학원이 J학원인데 오픈 직전 불이 나 한달 가량 개강이 미뤄졌다. 그러나 개강 첫 달부터 흑자가 나고 3개월 만에 투자비 전액을 회수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가족 생활비는 물론 학원이 책임지기로 돼 있었다.

나는 66년 4월부터 4년간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H원장이라는 사람은 우리집에 한 달에 3만원밖에 주지 않았다. 당시 환율이 1달러에 360원이었으니 3만원은 83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H원장 자신은 고층빌딩을 지어 학원을 옮기고 세계 유람을 돌아다닐 정도로 큰 부자가 됐다. 나는 그와 문서로 계약을 하지 않은 걸 무척 후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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