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강사 생활은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현필 EMI 학원장과의 당초 약속은 지켜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준비하는 수학 선생이 되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나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나온 모든 고교 수학 교과서와 참고서를 두 권씩 샀다. 그런 다음 모든 문제를 가위로 오려 카드를 작성했다. 사방 벽에촘촘히 서가를 만들어 이 카드를 분류해 꽂았다. 이렇게 분류된 카드는 수만 장이 됐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수학 문제를 갖고 있는 교사라고 자부했다. 더 나아가 서울대 도서관과 국립도서관, 시립도서관 등을 샅샅이 뒤져 수학의역사와 수학자의 전기, 수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모아 노트에 정리했다.
학원 수강생들은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합격하는 게 최대 목표였다. 때문에 나는 기출 문제를 수 없이 검토하고 채점 교수들로부터 성적분포를 알아 보았다. 이때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서울대에 지원한 학생 중 수학 과목에서 30점만 맞으면 꽤 잘한 편에 속하고 웬만한 학과는 거뜬히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괜히 어려운 문제를 많이 푸는 것 보다 기본적인 문제 해법을 제대로 익히는 게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서울대 시험에서 100점을 목표로 준비하면 20점도 맞기 힘들지만 기본적인 요점을 확실히 파악해 50점만 맞겠다고 작정하면 30점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반대로 생각했다. 어려운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 고득점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시험에서도 작전은 매우 중요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대신 내가 가르쳐 주는 요점만 철저히 파악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명강사가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려고 애썼다.
우선 수학 참고서를 썼다. 이지흠(李之欽)이라는 필명으로 21권을 출간했다. 수학의 강의, 입시수학의 분석연구, 해석대전, 기하대전, 중학수학대전 등이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데는 하나같이 실패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는 고교 수학을 완전히 분해, 나름대로 다시 조립하고 독학으로 얻은 경험을 살려 ‘이지흠식’ 설명을 붙였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많은 학교에서 부교재로 사용해야 하는데 고교 선생들이 봤을 때 내 책은 순서도 다르고 설명 방식도 영 딴판이었다. 이런 까닭에 기존 교수법을 바꾸지 않는 한 내 책을 채택하기 힘들었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과거의 책에 비해 10% 정도만 좋으면 되지, 50% 이상 개선하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것이다. 나는 지금도 베스트셀러 참고서를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나는 또 기독교방송(CBS)의 새벽 시간에 전국의 수험생을 상대로 대입 수학강의를 했다. 수학을 라디오를 통해 가르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1956년부터 3년간이나 라디오 강의를 이어갔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내 책을 읽으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을 강조하고 요점을 지적해 주면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때 CBS의 박화목 편성국장은 내 강의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박 국장은 국민 애창곡인 보리밭이라는 노래를 작사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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