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 으스스한 그림책을 소개하겠다. 꼬마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에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책장을 넘길 것 같다. 어른들은 짐짓 딴청을 하면서도휘익 빨려 들어갈 책을.영국 시인 메리 호위트(1799~1888)가 1829년에 쓴 시로 엮은, 미국 화가토니 디터리지(35)의 독특한 그림책 ‘거미와 파리’다. 줄거리는 순진한파리 아가씨가 능글맞은 거미 아저씨의 달콤한 말에 속아 그만 거미밥이 되고 만다는 비극이다. 아, 그게 어찌 파리 아가씨만의 불행이랴. 상냥한 얼굴로 다가오는 위험이 도처에 널린 요즘 같은 세상에.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컴컴한 흑백 톤, 꼭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분위기다. 첫 장면, 으스름 달밤 거미 아저씨의 음침한 저택 풍경부터가 심상치 않다.
클라이맥스는 거미줄에 친친 감긴 파리 아가씨의 마지막 순간이다. 겁에 질린 그녀에게 닥쳐오는 그림자, 거미 아저씨의 길게 뻗친 다리는 정말이지 오싹하다.
진작에 거미밥이 되어버린 귀뚜라미 할아버지와 나비 부인의 유령도 나오지만, 이미 죽은 신세라 어찌 하지 못하고 파리 아가씨의 비극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마지막 장면. 죽은 파리 아가씨가 선배 유령들과 나란히 선 채 자신의 묘비를 보고 있다.
거기서 끝난 줄 알았더니, 뒷장에 거미 아저씨의 편지가 나온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조심하세요. 세상에는 거미만이 사냥꾼이 아니고 벌레만이 희생자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지요.” 파리를 잡아먹고 나서 능글맞게 충고를 하는 느긋한 표정이라니, 으, 정말 무서운 거미 아저씨다.
그림을 잘 살펴보면 익살맞기도 하다. 거미 아저씨의 의자 다리 받침인 무당벌레 눈에 X표를 해서 죽었음을 표시하는 등 곳곳에 화가의 장난끼가 숨어있다. 거미 아저씨 식탁에 오른 음식 접시를 보라, 뚜껑 밖으로 삐어져 나온 벌레 다리가 얼마나 징그러운지.
어른들은 이 그림책에서 노스탤지어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에 착 달라붙는 종 모양 모자와 작은 손가방, 통이 좁은 층층치마 차림을 한 파리 아가씨의 우아한 패션이나, 높다란 실크햇과 말쑥한 정장이 마피아 두목처럼 보이는 거미 아저씨의 세련된 패션은 1920년대 유행했던 것이다.
거미 아저씨의 끈질긴 초대를 거절하던 똑똑한 파리 아가씨가 거미의 꼬임에 빠져 한발한발 죽음에 다가서는 모습은 아슬아슬하다. 예쁘고 멋지다는 칭찬에 넘어가는 파리 아가씨의 어리석음이 안타깝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냉정한 우화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즐거운 그림책이 되었다. 어른들이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꼬마들은 눈치채고 다짐할 것이다.‘조심, 또 조심!’ 이라고.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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