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절이 확실히 구분돼 딱딱하게 들리는 한국어와 달리 영어나 불어는 두루뭉술하고 부드럽다. 오죽하면 이들에 대한 의성어로 ‘숄라숄라’라는 말을 즐겨 쓸까.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언어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음절이 나뉘어지는 시차나 목소리의 고저(高低)를 주파수로 분석하면서 언어 사이의 구분 기준을 단순한 단어와 문법의 차이가 아닌, 수치를 가진 자료로 뽑아 비교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신경과학연구소 아니루드 파텔 박사가 이 달 15~19일 샌디에고에서 열리는 ‘미국 음향학회’ 회의에서 발표, 과학저널 네이처 인터넷판에 소개된 ‘언어의 리듬과 멜로디를 반영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음악’이라는 논문은 작곡가의 모국어와 음악이 갖는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음악은 언어의 특성을 따라갈까
졸업 시즌이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은 전형적인 영국 음악으로 어쩐지 영어와 비슷한 느낌이다. 굳이 작곡가의 출신지를 모르더라도 베토벤의 ‘운명’은 힘있는 독일어를, 드뷔시의 피아노곡 ‘달빛’은 유려한 프랑스어를 연상케 한다. 작곡가의 국적과 음악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과연 편견 때문일까.
파텔 박사 연구팀은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음악과 언어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결론 짓는다. 영어의 특징은 긴 모음 다음에 짧은 모음이, 강한 악센트 후에 약한 음절이 따라온다는 ‘규칙적인 강약 차이’. 반면 프랑스어의 악센트는 별다른 규칙성을 지니지 않아 영어 문장에 비해 자유롭게 들린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의 언어는 비슷한 단어와 문법을 지닌다. 어원이 같다고 알려진 영어와 아랍어가 비슷한 강약 패턴을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지리적 연관성이 떨어지는 경우 단순한 언어 습득으로 음절의 리듬과 고저 차이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한 예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자마이카 사람들은 미국인과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악센트는 전혀 다른 ‘사투리’ 영어를 구사한다.
파텔 박사 연구팀은 이 같은 언어간 차이를 수치로 분석하기 위해 ‘연속음절 변동표준지수(nPVI)’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 지수는 한 모음과 다음 모음과의 길이 차이를 수치로 나타내 평균을 구한 것으로, 영어와 불어를 비교한 결과 영어의 nPVI가 불어보다 훨씬 컸다. 영어 문장에 나타난 모음의 길고 짧기는 크게 달랐던 반면, 프랑스어의 모음은 길이가 비슷비슷했다.
연구팀은 아울러 영국(엘가, 홀스트, 박스 등)과 프랑스(드뷔시, 포레, 라벨, 생상 등) 작곡가들의 음악을 같은 방법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두 나라의 음악은 언어와 비슷한 정도의 nPVI 차이를 보였다. 영국 음악이 적절한 장단으로 확실한 리듬감을 지녔던 반면, 프랑스 음악은 음의 장단 차이가 훨씬 적어 흐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음악_언어 상관관계, 실어증 치료에 활용
언어의 또 다른 구성 요소인 고저 역시 주파수라는 수치로 분석될 수 있다. 연구팀은 언어의 리듬과 음악의 상관관계를 찾아낸 후 작곡가의 모국어가 갖는 인토네이션(intonationㆍ고저 차이)이 음악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여기에는 목소리의 주파수를 측정해 다음 모음에서 측정한 주파수와 비교한 후, 그 차이를 반음 기준으로 나타낸 ‘모음 피치(pitchㆍ고저)’라는 개념이 사용됐다.
예를 들어 ‘파인딩(findingㆍ찾다)’이라는 단어에서 ‘파_인’ 사이는 평균적으로 4반음 정도가 올라갔고 ‘인_딩’에서는 약 2.5반음이 내려갔다. 이 때 ‘파인딩’이라는 단어의 ‘모음 피치’ 지수는 4에서 2.5를 뺀 1.5였다. 데이터 분석 결과 모음_모음 사이의 평균 고저 변화는 영어와 불어 모두 2반음 정도로 비슷했다. 그러나 영어가 1에서 6반음을 오가며 비교적 큰 고저차이를 보인 반면, 불어는 2반음 정도를 꾸준히 유지했다.
두 나라 작곡가들이 만든 음악의 고저 역시 언어와 같은 양상을 보였다. 영국 작곡가가 만든 멜로디는 고저 차이가 컸으나,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은 영국 작품과 비교할 때 멜로디의 높낮이 변화가 별로 없었다.
파텔 박사는 “음악과 언어의 상관관계는 뇌의 언어 영역에 대한 이해와 실어(失語)증 치료에 활용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음악과 언어를 관장하는 뇌의 영역은 완전히 다르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연구 결과가두 영역의 연관성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고로 음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도 언어 능력에는 전혀 이상을 보이지 않는 환자나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도 훌륭한 음악적 능력을 지녔던 러시아의 작곡가 쉐발린 등 지금까지는 두 영역이 완전히 분리됐다는 증거가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파텔 박사는 그러나 “음악과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영역 사이에는 확실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토대로 다양한 뇌영상 연구를 해본 결과 두 영역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일정 영역, 특히 손상됐을때 ‘브로카 실어증’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브로카 영역’에서는 겹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설명했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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