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이전 개인 저술로는 가장 방대한 지식을 담은 백과전서다. 사료 가치가 높지만 모두 113권 52책이라는 엄청난 규모 때문에 국역을 전문으로 하는 정부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를 비롯해 누구도 섣불리 번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건축 등 극히 일부 내용이 그것도 발췌 형식으로 번역되었을 따름이다.이 책을 30대 젊은 학자 19명이 의기투합해 우리말 완역에 나섰다. 최대 40권에 이를 전체 교감역주본 가운데 농학을 다룬 ‘본리지(本利志)’ 등 몇 권이 이르면 내년 초에 지식산업사에서 첫 출간된다.
‘임원경제지’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역자를 그러모으는 등 구심 역할을 한 사람은 정명현(35) 숭실대 강사. 유전공학을 공부한 과학도지만 도올서원과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수학, 고전 과학서에 관심을 가지면서 임원경제지 번역 욕심을 냈다. "중견학자가 중심이 되어 번역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일개 박사과정 대학원생의 제의로 선뜻 이런 일을 맡을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태동고전연구소 등에서 동문수학한 ‘386’을 중심으로 번역진을 꾸렸다.
‘임원경제지’는 관직에 나가지 않은 선비가 향촌에서 살아갈 방도를 알려주는 책이다. 30세를 전후해서 죽을 때까지 서유구가 50년 동안 매달려 쓴 책답게 농사짓기부터 원예, 건축, 요리, 염색, 각종 기구 제작, 독서법, 건강법, 의학은 물론 심지어 재테크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번역자들도 해당 분야 전문가가 다수 포함됐다. 한의사 전종욱씨가 의학관련 내용을 담은 보양지( )를,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을 공부하는 임종훈씨가 유예지(游藝志)를 맡는 식이다. 정씨는 "농학, 생활·과학, 의례·예술 분과로 나뉜 번역진은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회의를 소집해 토론한다"며 "현재 60% 정도 번역을 마쳤고 끝나면 해당 분야 전문가의 감수를 거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번역자들의 의욕도 가상하지만 이 계획을 듣고 선뜻 3억원을 쾌척한 후원자의 용기도 아름답다. 서울 대치동에서 영어전문학원을 운영하는 송오현(39)씨는 평소 친분 있던 정명현씨에게서 번역 계획을 듣고 흔쾌히 번역비 지원을 약속했다. 책을 낼 지식산업사 김경희 대표도 ‘임원경제지’와 인연이 남다르다. "작고한 어류학자인 정문기 선생이 1992년쯤 임원경제지 중 전어지(佃漁志) 번역을 부탁했습니다." 그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미안했는데 두 달 전 갑작스레 완역본 출간 의뢰를 받고 기쁜 마음에 그날은 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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