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을 전후한 이맘때면 메주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집안 천장의 터줏대감마냥 자리잡고 있던 모습, 그리고 발효과정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고약한 냄새로 겨우내 코를 막고 지내야 했던 일들…. 아파트생활이 보편화하고 재래식 된장 빚는 방법이 뒷전으로 물러나면서 이제는 매캐한 냄새와 씨름할 일은 사라졌지만 가끔은 방안 가득 메우고 있던 메주의 추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첼로에 대한 단상은 정반대이다. 단정한 양옥집에 수세식 화장실을 쓰던 부잣집 도련님이나 아가씨들이 만질 수 있었고, 많은 클래식 악기 중에서도 우아하고 고상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 첼리스트와 스님의 '구수한 사랑'
강원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위치한 된장마을 ‘메주와 첼리스트’를 방문하기 전 가졌던 선입견 역시 이런 고정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주제를 억지로 붙여놓은 듯해 더욱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극과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마치 사물놀이와 재즈의 한판 어우러짐이 묘한 조화를 이루듯, 메주와 첼로와의 만남 역시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국내 대표적인 웰빙음식으로 자리잡은 된장과 그 향기에 어우러지는 첼로의 선율. 이질감속에 묻어나는 환상적인 조화야말로 많은 관광객들이 ‘메주와 첼리스트’를 찾는 이유이다.
가는 길부터 쉽지 않다. 수도권에서 출발, 영동고속도로 강릉IC에서 나온 뒤 성산방향으로 가다가 임계사거리에서 동해방향으로 8km간 뒤, 도전리마을에서 4km를 더 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다. 특유의 메주 띄우는 냄새가 마을이 가까웠음을 알린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4시간만이다.
안주인인 첼리스트 도완녀(50)씨가 방금 도착한 서울 예지원 월우회 회원 30여명을 상대로 작은 콘서트를 하느라 분주하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도씨는 독주회 16차례에 수원시향, 서울심포니 등과 협연을 가져온 유명 연주가였다. 그러던 그가 남편 돈연스님을 만나 결혼하고, 된장마을에 내려와 시골 아낙으로 변신한 사연은 이미 유명한 러브스토리가 됐다.
12년전 농민운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정선에 정착하면서 시작한 된장만들기는 이제 도씨의 중요한 삶의 일부분이 됐다. 하지만 40년 넘게 연주해온 첼로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된장을 담은 장독대를 배경으로 한 연주회에는 도씨의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콘서트의 첫 장은 10여년을 이 곳에서 살아오면서 그가 터득한 삶에 대한 지혜가 담긴 강의와 기체조 특강이다.
"자기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인생자체가 보잘 것 없어진다"는 골자의 강의에 대다수가 주부인 객석의 반응이 뜨겁다. 도교와 불교의 전통무술에 기반을 둔 기체조 강의가 이어지자 주부들의 따라하기가 자못 진지하다. 공연장 뒷편 솔밭에는 솔잎이 떨어져 바닥에 제법 수북이 쌓였다. 모두 신발을 벗고 맨발로 솔밭을 걷는다. 땅바닥의 기와 소나무에서 발생하는 피톤치트향이 방문객에게 건강을 듬뿍 안겨줄 것만 같다.
드디어 첼로를 든 도씨의 연주가 시작된다. ‘사랑을 위하여’‘그리운 금강산’‘눈물 젖은 두만강’ 등 소품으로 시작,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내더니 ‘헝가리광시곡’으로 현란한 솜씨를 뽐내고 다시 ‘아리랑’으로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연주회를 마무리한다.
◆ 앞마당 3,200여개 장독대 '장관'
이제 된장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앞마당을 가득 채운 3,200여 개의 장독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 양산 통도사 서운암에서 보았던 장독대와는 느낌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장독마다 간장, 된장, 고추장이 가득하다. 한해에 이 곳에서 소비하는 콩이 12만kg에 달한다. 80kg짜리 1,500가마 분량이다. 메주를 띄운 뒤 최소 2년이 지나야 제품으로 출시된다. 1년 된 장은 깊은 맛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씨는 "사람의 미각은 짠맛, 단맛, 쓴맛, 신맛 등 4가지가 기본이지만 한국의 장에서는 이외에도 매운맛, 떫은맛, 구수한 맛 등 20여가지 맛을 느낄 수 있다"며 "발효과정에서 각종 세균과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깊은 맛은 외국의 어느 음식도 따라올 수 없다"며 장 예찬론을 펼쳤다.
/정선=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된장마을 | 장맛 좀 볼까
메주와 첼리스트에서 제조되는 장은 기존 장과는 조금 다르다. 도씨 부부가 수년간의 연구 끝에 개발해낸 특별한 비법이 장 속에 포함돼있기 때문이다. 이중 최근 개발에 성공한 겹된장과 겹간장은 벌써부터 구입문의가 빗발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겹된장은 사찰이나 종가집에서 전수되어 오는 방법의 일부를 차용한 것. 일반 된장이 국산 햇콩과 전남 해남에서 가져온 천일염으로 메주를 띄우는 데 비해, 겹된장은 햇콩에 1년 동안 삭인 된장으로 메주를 제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겹간장은 메주에 소금을 섞은 일반 간장과는 달리 메주에 1년 삭인 간장을 섞어 만든다. 두 번 발효하는 과정에서 맛과 향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이 도씨의 설명이다.
된장과 청국장을 휴대하면서 먹기 좋게 알약으로 제조한 제품도 인기 있다. 쌈장은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넣은 막장을 1년간 숙성시킨 뒤 간장과 메줏가루를 첨가, 덧장을 만들고 다시 2년을 재숙성시킨 뒤 마늘즙, 양파즙, 꿀을 넣어 맛을 냈다. 정선군의 우수영농인이 생산하는 고품질 더덕을 잘게 찢어 고추장, 꿀, 마늘을 넣어 만들 더덕고추장장아찌는 입안 가득 퍼지는 더덕향과 함께 아작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현장에서 직접 구입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홈페이지를 통해 주문한 뒤 택배로 받아볼 수도 있다. www.mecell.co.kr (033)562-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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