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애간장을 태웠던 ‘벽계수’는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도정(碧溪都正) 종숙(終叔)이라는 주장이 나왔다.강원 원주교육청의 박문성(朴文聖·54·평원문화연구소장)씨는 시 계간지 ‘시평’ 겨울호에 기고한 글에서 "벽계수는 조선 인종조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종숙이며 그의 묘는 원주 문막 동화리에 있다"고 밝혔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연모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그렸던 인물. 시조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엇더리’ 라며 애닯아 했다.
이종숙은 세종의 손자인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 의(義)의 다섯째 아들로 1508년 출생했다. 고종때 서유영이 ‘금계필담’에 적었듯 벽계수가 ‘종실(宗室)’ 인물임이 확인됐고, 황진이의 출생연도가 1506~1515년으로 추정되는 만큼 동시대 인물임도 밝혀진 것. 영해군파 족보에 따르면, 벽계도정 종숙의 호는 현옹이며 정3품 왕실 벼슬인 도정을 역임했다. 그가 황진이를 만났던 당시는 정4품 수(守)의 관직에 있을 때였던 것으로 박씨는 추정했다.
또 금계필담 내용 중 "황진이는 풍류명사가 아니면 상대하기 어렵다…공(벽계수)은 본시 거문고의 명수이니"하는 대목에 대해서도 박씨는 "이종숙의 가문이 기묘사화(1519년)때 풍비박산 돼 불우한 나날을 보냈으며, 중종1년인 1545년에야 신원(伸寃) 된 만큼, 그는 긴 세월 음풍영월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98년 원주시사편찬위원으로 일할 당시 제보를 받고 6개월간 자료조사를 거쳐 밝혀냈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대 오탁번 교수 등이 이같은 내용의 사실성을 확인해준 적이 있고, 이에 근거해 몇몇 발표논문의 벽계수 관련내용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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