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에 남녀를 구분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일 지 모른다. 메트로섹슈얼(외모와 치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도시 남성)이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면서 옷에서도 성차를 넘나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 욕망은 남성쪽에서 좀 더 강하다. 따지고 보면 서양패션사에서 섹시한 각선미를 살려주는 스타킹이나 하이힐은 원래 남성의 것이었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듯, 장장 10일에 걸친 대장정 끝에 11일 막을 내린 2005 S/S 서울&스파 컬렉션에는 치마 입은 남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여성복을 닮아가는 남성복, 당신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 남자에게 치마를 허(許)하라
8일 오후5시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열린 디자이너 장광효씨의 쇼. 검정색 연미복 차림의 모델이 무대에 등장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불을 뿜었다. 치렁치렁한 제비꼬리가 종아리까지 늘어진 검정 재킷 아래 글렌체크의 회색 랩스커트를 입은 모델은 망사 스타킹까지 맞춰 신은 모습. 이어 나온 모델은 커다란 스카프를 허리에 둘러 리조트웨어용 치마처럼 입었다. 허리부터 무릎까지는 통치마처럼 붙고 무릎 밑으로 갈라지면서 고무줄로 여민 치마형 할렘팬츠에 재킷을 곁들인 모델도 시선을 끌었다.
장씨의 쇼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3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벌어진 디자이너 홍승완씨의 무대서도 치마 입은 남자들이 등장했다. 감각있는 레이어드(겹쳐입기) 룩으로 정평을 얻은 홍씨는 재킷아래 무릎길이 앞치마 형태의 면소재 풀오버를 입고 그 아래 다시 짧은 반바지를 입혀 언뜻 보기엔 영락없이 치마정장 차림을 연출했다. 잔잔한 러플을 층층으로 달아 화려하게 꾸민 무릎길이 조끼형 풀오버나 뒷자락이 불규칙적으로 길게 늘여진 니트 이너웨어, 바지위에 짧은 미니원피스를 덧입은 스타일링, 허리를 살짝 덮는 길이의 짧은 A라인 재킷 등은 영락없는 여성복 차림이어서 눈길을 모았다.
9일 패션쇼를 펼친 이주영씨는 검정색 셔츠와 바지위에 검정색 스커트를 레이어드하는 발랄한 연출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 더 섹시하게, 더 여성스럽게
섹시함에 대한 강박은 이번 컬렉션 남성복 쇼의 공통 요소였다. 3일 첫 무대로 펼쳐진 디자이너 정욱준씨의 쇼는 건장한 가슴을 드러내며 깊숙이 패인 목선, 패티시즘을 연상시키며 목에 두른 길고 가느다란 티펫 장식, 말쑥하게 재단한 연미복 재킷 아래 입은 엉덩이가 타이트하게 올라간 청바지 등 남성패션의 섹시함과 의외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모델들은 커다란 복고풍 선글라스에 길게 나풀거리는 생머리로 등장, 60년대 런던의 멋쟁이족 테디보이즈를 연상케 했다.
장광효씨의 무대서도 재킷 안에 받쳐입은 니트는 몸에 착 달라붙는데다 가슴 윗부분을 송두리째 파내 노출에 대한 호기심을 극대화했다. 언뜻 평범해보이는 정장도 몸에 착 달라붙는 니트나 빨강색 실크블라우스를 받쳐입어 배우 정우성이 컴퓨터 광고에서 보여준 섹시한 카사노바 이미지를 살렸다.
색상은 화사함만을 본다면 어지간한 여성복 쇼를 앞질렀다. 정씨는 흰색과 녹색 보라색 오렌지색으로 이어지는 스트라이프 무늬의 색조 배합으로 밝고 달콤하면서 세련된 이미지를 담아냈다. 홍씨는 노랑과 오렌지가 뒤섞인 로고플레이 재킷으로 신선한 색배합을 자랑했다.
◆ 과감한 남자가 아름답다
남성복의 여성화 경향에 대해 정욱준씨는 "캐주얼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메트로섹슈얼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듯 젊은이들이 관습적인 틀에서 벗어나 스타일링의 재미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캐주얼에서는 굳이 남성·여성을 가르지않기 때문에 좀 더 드라마틱한 변신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고 결국 성의 금기를 깨는 형식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장광효씨는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에서 남성용 치마가 등장하듯, 원조 꽃미남 가수 김원준씨가 한때 치마를 입고 무대에 섰듯, 좀 더 펑키한 느낌을 원하는 젊은 세대에게 치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컬렉션이야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그치지만, 남자라고 (치마) 못입는다는 법은 없지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컬렉션은 트렌드를 제시하지만 유행을 만드는 것은 결국 소비자다. 이제 공은 다시 남성 일반에게 주어졌다. 재미와 관습, 누구의 손을 들 것인가.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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