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리 먹는 게 꿈이었지. 허허~"1951년 1월4일(1·4후퇴) 평남 평원. 10살짜리 사내아이는 "3일만 바람 쐬러 간다"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흘러흘러 닿은 곳은 피란지 부산. 어머니와 형님, 누이 넷을 두고 왔지만 그게 끝이었다. 손가락 빨던 피란민 아이의 유일한 소망은 "한번 배터지게 먹는 것"이었다. 방망이 들고 야구를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반세기가 흘렀다. 아이는 꿈을 이뤘고 한술 더 떠 한국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가 김용용(63) 프로야구 삼성 신임 사장이다.
10일 경산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에서 만난 김 사장은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다. "말주변이 없고 음치라 결혼식 주례와 노래는 절대 사절"이라고 손사래를 칠 만큼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김 사장이다. 하지만 이날은 술술 풀어놓았다. 솔직하다. "인터뷰가 너무 많아, 말도 하다 보니 느네." 한마디 덧붙였다. "내 18번이 왜 ‘목포의 눈물’인 줄 알아. 해태 시절 이겼다 하면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거야. 흥얼흥얼하다 보니, 허허…"
사장이란 타이틀도 부담스런 모양이다."‘사장’자 붙이면 어색해. 둘째 딸이 ‘사장이 뭐 하는 거냐’고 묻더라니까. 시원섭섭해. 발 쭉 뻗고 잘 줄 알았는데 전날 문득 사회에 첫발 내딛던 날 밤이 떠오르더라구. 제대로 못 배운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걱정이야."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출퇴근. 정상적인 출퇴근은 20여년 만(한일은행 시절)이다."넥타이 오래 매면 메스꺼워. 1년에 한두 번 매나. 한달 정도 여유가 있다는데(취임은 다음달 1일) 여기저기 경조사 나오라는데 골치아파."
그는 자신을 "타고난 복장(福將)"이라고 했다.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양준혁 등 특별한 선수가 늘 밑에 있었고 은행장이든 사장이든 윗사람도 다 좋았어. 그게 장수 비결이야. 열번 하면 다섯번 지는 게 야구인데 운 없으면 안돼."
정말 우연히 시작한 야구였다. 한참 축구에 재미를 붙이던 개성중 1년 때 학급대항 야구시합에서 야구부 주장의 눈에 든 게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의 포지션은 1루수로 알려졌지만 "투수 좌익수 등 안 해본 게 없다"고 했다. 선수시절엔 "번트를 대본적이 한번도 없다"고 할 만큼 힘의 야구를 신봉했다. 한국시리즈 10회 우승 등 늘 영광에 자리에 있었지만 좌절의 날도 있었다. 그는 60년 고교졸업 후 덩치가 크고 둔하다는 이유 때문에 농업은행에서 거절 당하고 한국운수 연습선수(촉탁)로 지내야 했다. "부산서 야구 좀 한다고 했는데 촉탁이라니. 서울 간다고 자랑 많이 했는데 갈 데가 없으니까 창피했지." 이를 악문 계기였다.
83년 해태 감독을 맡은 게 첫 성공이라고 했다. "한일은행 감독 월급이 38만원이었는데 프로 감독 연봉이 2,400만원이었으니까. 100만원씩 저축하고도 살 만합디다."
그는 유소년 야구 발전에 대해서 애정을 보였다. "야구하는 애들이 없어. 희망이 없으니까. 가난한 애들 프로가면 ‘부모형제 보살필 수 있구나’ 하는 꿈을 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요. 고쳐야지."
야구 외에 다른 계획은 없을까. "난 야구쟁이야. 시간 나면 슬슬 산이나 타야지. 지리산 좋습니다. 가보세요. 테니스도 20년 가까이 쳤는데 무릎이 좋지 않아서 못 쳐요. 골프도 조금 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바둑(5~6급)이나 함께 둘 친구 하나 만들면 좋겠구먼, 허허~."
경산=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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