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연설은 선거패배를 인정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격렬했던 선거전이라도 일단 결과가 나오면 진 후보가 깨끗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상대 후보를 축하해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그러나 얼마나 진정으로 패배를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진다. 겉으론 인정했으나 속으로 울분과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면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도 패배의 충격에서 쉬 벗어나기 힘들다.■ 어제 막을 내린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패한 민주당 존 케리 후보는 꽤 긴 패배인정 연설을 했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축하하고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들과 선거운동원, 그리고 자신과 부통령 후보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의 가족 이름을 일일이 거명해 감사를 표시했다. 무엇보다도 A4용지 3장이 넘는 그의 연설 중에서 "우리가 치유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대목이 진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분열과 대립을 치유하는 데 자신이 앞장설 것임은 물론 지지자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 부시 승리 주를 빨간색으로, 케리 승리 주를 파란색으로 표시한 지도를 보면 현재 미국사회가 지역적으로 어떻게 갈라져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온다. 북부(민주당)와 남부(공화당), 동서해안주(민주당)와 중부내륙주(공화당)의 구분이 너무도 뚜렷하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이념별, 세대별, 계층별로 미국사회가 겪고 있는 대립과 갈등은 이번 선거과정에서 더 한층 증폭됐으며 이를 해소하지 못하면 미국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패배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출발이다. 케리는 치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단결을 호소하는 이 연설로 자신의 쓰린 마음을 상당부분 추슬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패배로 상처를 받았을 많은 사람들,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 밖에서 그를 성원했던 외국인들의 낙담을 다독거리고 기분을 전환시키는 효과도 냈다고 본다. 치유는 상처를 준 대상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서 완성된다. 지금 이 순간 상처를 준 상대를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먼저 상처를 조용히 응시하고 받아들일 일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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