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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4.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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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이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먼 나라이기도 합니다.현재 칠레로 가는 가장 빠른 코스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등을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일행 중에 미국 비자가 없는 이가 있어 부득이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9·11테러 이후 비자가 없으면 미국을 단순히 경유하는 것도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경유지가 유럽입니다.

한반도를 중심에 둔 세계지도에 익숙해진 탓에 유럽에 들렀다 남미로 가는 길은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칠레는 한국과 대척점에 있기에 동쪽으로 도나 서쪽으로 도나 그리 큰 차이는 없습니다.

서울에서 프랑크푸르트, 마드리드를 거쳐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중간 경유지에서 1~2시간씩 쉰 시간을 합해 꼬박 32시간이 걸렸습니다.

시속 1,000㎞의 속도로 난다는데 스크린으로 비행궤적을 보여주는 지도 속 비행기는 참으로 더디게 갑니다. 특히 장거리 비행에선 더합니다. 이번 칠레 여행이 그랬습니다. 유럽까지는 그나마 참을 만 했는데 갈아탄 비행기가 마드리드를 거쳐 산티아고로 향했을 때 마음 속으로 재는 비행기 속도는 ‘시속 0㎞’에 가까웠습니다.

양계장의 닭처럼 비행기 좌석에 갇힌 채, 3시간은 지났겠지 하고 시계를 보면 30분도 지나지 않았고 지도 속 비행기는 여전히 제자리입니다. "위치 추적 시스템이 고장난 것은 아닐까" "인근 공항에 비상착륙이라도 했으면" 등 별의별 상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짜증낼 기력도 쇠진해 비몽사몽 헤매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지도 위 비행기가 드디어 안데스 산맥에 걸터앉았습니다. "살았다"는 환호가 절로 나왔습니다. 창 덮개를 올리니 마침 날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던 안데스 산맥이 눈 아래 펼쳐졌습니다. 구름위로 솟구친 거대한 연봉들. 봉우리들이 뒤집어 쓴 순백의 만년설 위로 아침 해의 찬란한 붉은 빛이 번져나갔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독과 갑갑함이 사라져 버릴 만큼의 감동이었습니다.

다가가기 힘들었던 칠레는 보답이라도 하듯 그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마중을 나왔습니다. 고생을 해야 기억에 남는다고 하죠. 여행 내내 칠레의 화려한 풍광들은 가슴 속에 꾹꾹 새겨졌습니다.

참, 안데스의 환한 인사 덕분인지 산티아고에서 또다시 갈아탄 푼타아레나스로 가는 5시간 짜리 비행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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