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성폭행 피해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피해 여성들이 여성경찰관에게 사건조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여경조사청구권 제도’를 도입했으나 일선 경찰의 무관심 속에 실효성 없는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경찰은 남성경찰관들의 성폭행 조사가 피해 여성들의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 3월부터 피해자가 여경의 진술조사를 요구할 수 있는 여경조사청구권 제도를 도입, 당사자에게 직접 이를 고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 일선 경찰서에서는 인력 부족과 수사상의 문제점 등을 이유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부근에서 30대 남성에게 성추행과 폭행을 당한 이모(28·여·회사원)씨는 고소장을 제출했다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남성경찰관이 수사 도중 이씨에게 객차 내 성추행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 남성이 뒤에서 바짝 밀착한 뒤 반복적으로 몸을 흔드는 등의 성추행 장면을 곤혹스럽게 설명해야 했다. 여경조사청구권이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고지해야 했지만 경찰은 이 같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웃 노인에게 성폭행을 당해 광주 남부경찰서에서 지난 9월 조사를 받은 김모(28·여)씨도 마찬가지였다. 여경조사청구권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남성경찰관을 피해자가 입원해 있던 산부인과로 보내 당시 상황에 대한 진술을 받아내 피해자 가족들이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특히 일부 경찰관은 여경조사청구권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제도 시행의 허점을 드러냈다. 한 경찰관은 "우리 경찰서에서도 모르는 직원이 태반"이라며 "법규가 아닌 단순 제도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대부분 고소·고발로 경찰 조사가 시작되는 성폭행 사건은 여경이 거의 배치되지 않는 형사계나 강력반에서 처리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여경들은 대부분 여성청소년계에 배치돼 있으나 기본업무가 바빠 사건 때마다 협조요청을 해 임시 파견을 받는 것이 쉽지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정유석 부장은 "남성경찰관의 성폭력 피해조사가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의 소지가 많아 이 제도가 도입됐는데 경찰이 과거 관습대로 여경 없는 성폭력 조사를 계속한다면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라며 "여경 부족은 이 제도 도입 이전에 해결했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군 이하 경찰서에는 인력부족 때문에 여경이 배치되지 않은 곳도 있어 일단 인력충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부족한 여경이 충원되는 대로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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