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작되작 잡지를 헤적이다 우연히 읽게 된 연재물에 빠져 지난 호를 뒤지고 다음 호를 기다리듯, 소설 한 권을 읽고 나면 나머지를 찾아 읽지 않으면 못 배기게 하는 작가들이 몇 있다. 유대계 미국작가 폴 오스터(Paul Auster)와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 문단의 ‘귀여운 악마’로 통하는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는 이 ‘중독성 작가군’에서도 선두그룹에 서 있다. 오스터의 산문집과 젊은 시절 발표했던 시 모음집, 노통브가 지난 해 발표한 12번째 소설이 나란히 번역 출간됐다.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우연으로 가득찬 삶의 秘意 산문집 ‘빨간 공책’나와
폴 오스터는 그가 구축한 독특한 리얼리즘의 경계, 즉 ‘우연성의 리얼리티’로 우뚝 선 작가다. "우연 역시 리얼리티의 일부"(‘폴 오스터 인터뷰와 작품세계’, 열린책들 발행)라는 그의 말처럼, 현실은 선험적 인과율로 개연성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해서 그는 자신을 리얼리즘 작가로 분류한다. 산문집 ‘빨간 공책’(열린책들 발행)은 그가 실제로 겪었거나 작품에서 주요 모티프로 활용했던 삶의 기괴한,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우연의 일상을 모은 책이다.
직장을 잃고 의지하던 친구마저 살해당해 절망에 빠져있는 한 젊은 여자가 있다. 시련은 끝이 없어, 끔찍이 사랑하던 고양이까지 병에 걸려 327달러의 수술비가 필요하다. 그러던 차에 승용차 운전 도중 숨진 친구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듣게 된다. ‘걱정 마. 곧 만사가 잘 될 거야.’ 깜짝 놀라 멈칫대는데 뒤차가 그녀의 차를 들이받는다. 배상을 사양하지만 가해자는 굳이 돈을 내겠다고 하고, 등 떠밀려 차 수리 액수를 산정했더니 정확히 327달러 였다.
2차 대전 막바지, 나치에 포위를 뚫고 탈출을 감행하던 한 세르비아 게릴라 대원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기절한다. 깨어 보니 농부의 달구지 위다. 안도도 잠시, 폭발음과 함께 농부가 즉사하고 대원은 소련군의 손에 넘겨진다. 야전병원 군의관이 대원의 다리가 가망 없다고 진단하고 톱을 들이대는 순간, 다시 교전. 대원은 농가에 인도돼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되고, 훗날 미국에서 보험설계사로 지냈다고 한다.
십여 년간 까맣게 잊고 살던 첫 사랑을 우연히 떠올린 직후 그녀의 전화가 걸려온다든지, 전시회를 위해 장기간 소재를 수소문하던 작품을 큐레이터가 묵던 호텔 바로 위층에서 찾게 되기도 한다.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등에 등장하는 우연한 유산(遺産)의 모티프처럼, 그 역시 30대 초반 파산 직전의 경제적 곤란을 겪던 차에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오스터는 한 인터뷰에서 "나의 모든 작품을 한 권으로 추린다면 ‘자서전’ 형태를 띨 것이며, 마치 조각 맞추기 퍼즐처럼 내 작품의 전부를 통해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주는 다면적 상(像)이 완성될 것"이라고도 했다. ‘빨간 공책’은 그가 써 온 소설만큼 기묘하고 매혹적인, 그가 살아온 세상 이야기, 소설 이야기이다.
■삶에 끼어든 '적과의 결투’소설 '앙테크리스타’출간내
노통브의 소설은 너댓 권쯤 찾아 읽고 나면 고만고만한 서사 구도와 등장 인물들의 유사성이 아쉬워진다. 하지만 그의 쫀쫀한 내면 묘사와 감칠맛 나는 표현들, 늘 새롭고 기발한 미시적 상상력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해서, 팬들은 매년 한 권씩 내는 이 젊은 작가의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데, 올해 번역된 작품은 ‘앙테크리스타’(문학세계사 발행)다. 대인관계에 턱없이 어두운 열 여섯 살 소녀 블랑슈가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끼어 든 동갑내기 친구 크리스타의 악마적 영악성에 상처 받고,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얌전하고 평범하지만 워낙 내성적이라 친구라고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는 블랑슈는 밝고 활달하고 육체적으로도 조숙한 대학 동기 크리스타를 존경하고 동경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타는 블랑슈의 생활에 슬며시 스며들어 그녀만의 공간을 잠식하고 부모님의 마음까지도 사로잡는다. 블랑슈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크리스타의 위성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수시로 가해지는 모멸적 언어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자칭 ‘신념에 의한 염세주의자’인 작가는 블랑슈의 심적 고통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차라리 혐오의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저열함의 표면에 머무는 것보다는 바닥까지 가는 게 덜 두렵기 때문이다.’ 블랑슈는 크리스타의 위선적 이중성에 치를 떨며 생각한다. ‘저 애의 이름은 크리스타가 아니야. 앙테크리스타(혹세무민의 적그리스도)야!’
서사는 블랑슈가 크리스타의 거짓을 가족 앞에 폭로하면서 반전하는 듯 하지만, 작가는 결코 쉬운 종결을 선택하지 않는다. 결말은 전작 ‘두려움과 떨림’에서 작가가 말한 ‘가치 뒤집기’, 즉 적의 예상을 뒤엎고 조롱하는 무대응의 저항을 연상케 한다.
악마적·가학적 타자와 나의 대비를 통한 서사의 전개는 ‘오후 네시’의 나와 베르나르뎅, ‘두려움과 떨림’의 나와 후부키 등과도 닮아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노통브는 "자기 안에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엄청난 적"이 탄생했고, 글쓰기란 이 "적과의 결투"이며, "적이 없는 삶이란 권태요 무의미와 동의어"라고 했다고 한다. 낯 익은 선율의 절묘한 변주를 통한 노통브의 이번 ‘적과의 결투’ 역시 삶의 권태와 무의미를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의 최근작은 지난 9월 프랑스에서 발표한 ‘배고픔의 이력’. 이를 놓고 국내 출판사 간의 판권경쟁이 치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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