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너의 눈동자를 보지 않았더라면…"나는 리어카에 맨발로 누워 저 멀리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고급승용차로 마지막 길을 가는 네 모습을 보면서 죽음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느꼈고, 잠시 우리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렇게 따로 먼 길을 갈 줄 알았다면, 너를 태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을 것이다. 그랬다면 너는 세계 명소를 돌아다니며 고급 호텔서 온갖 음식을 맛보며 살았을 테고, 나는 ‘별’ 개수를 하나씩 늘리며 어두운 세계의 거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잘난 돈을 뿌려대고, 자동차 경적을 빵빵대며 운명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위하여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눈처럼 순결한 사랑을 나눈 산골 물레방앗간의 추억을 간직한 나는 너와의 죽음으로 행복했다.
찬 바람 부는 겨울 명동거리로 ‘물건’ 운반을 나갔다가,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너를 모른 척 지나쳤더라면 우리의 축복 받지 못한 사랑은 싹을 틔우지 못했을 것이다. 칼을 든 불량배와 한차례 활극을 펼치는, 그 짧고도 급박한 순간에 마주친 너의 검은 눈동자는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떵떵거리는 고관대작 집 따님이라 살인누명을 벗겨준 것은 고맙지만, 너의 부모가 돈으로 사례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불쾌했다. 떠들썩한 술집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잔을 비워도 지울 수 없는 너의 눈동자. 술집 마담의 방을 찾아가 하룻밤 침대에서 뒹굴려 해도 너의 맑은 모습이 떠올라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네가 찾아오다니….
2층 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때, 내 다리는 설렘으로 휘청거렸다. 다방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던 너. 그런 너를 끌고 가 구경한 것이 기껏 레슬링이었다. 성난 짐승 같은 사내들이 씩씩거리는 링을 내려다 보며 나는 환호했지만, 너는 신문으로 눈을 가렸다.
첫 만남은 운명적이었지만 어차피 우리는 신분이 다른 사람. 하지만 메울 수 없는 신분의 골을 서로 뼈저리게 느끼기도 전에 너는 나의 우악스러운 행동에 감춰진 순수함에 반했고, 나는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않는’ 너의 해맑은 미소에 취했다. 뒷골목의 의리와 생존법칙만을 배웠을 뿐인 나에게 네가 흥얼거리던 ‘고향의 봄’은 귀에 설었지만 너무나 따스했고, 삭막한 삶에 작은 안식처를 제공했다. 베토벤의 ‘운명’을 듣고, 잠자기 전 성경책을 읽으면서 나는 딴 세상 속 네 행복의 달콤한 단편을 맛보았다. 그리고 혹시 내게 주어질지 모를 신분상승의 작은 기대감에 온몸을 떨었다. 네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싶었지만, 너를 집적거리는 놈들은 주먹으로 응징해야 했고 데이트 비용을 구하기 위해 공갈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내가 너는 안타까웠겠지. 내게 직장을 구해주겠다는 너의 말에 나는 "지저분한 일을 이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번도 꿈꿔본 적 없지만, 내게 다가선 행운을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류사회의 격식을 모르는 것은 흠이 되지 않지만, 못 배운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마나님의 말씀에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해방과 동족상잔의 비극, 독재와 혁명과 쿠데타로 이어지는 혼돈의 시대 한복판에서 자라나, 배운 것 없고 뒷골목에서 남들 등이나 치며 뱃속을 채워야 했던 삶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형무소에서 죽은 아버지와 유곽을 전전하던 어머니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놓은 인생일 뿐이었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고개를 숙인 채 거리를 배회하고, 하루 아침에 총칼로 권력을 휘어 잡는 이 부조리한 사회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사회가 법을 등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서두수를 만든 것은 아닐까.
조직의 동생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절규할 때, 나는 그 속담이 말뿐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조직과 경찰이 우리 뒤를 좇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와 나 사이를 가로 막은 두터운 유리 벽을 살아서는 깰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신분의 굴레에 짓눌린 육체를 벗어 던지면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나는 너를 통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지만 나는 사랑을 남겼다. 몸을 지탱하던 정신의 끈을 놓치는 순간 나는 소망했다, ‘다시 이땅에 태어난다면 천년을 사는 학이 되어 때묻음 없이 살고 싶다’고.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한국 청춘영화 출발과 흐름
‘맨발의 청춘’은 1963년 ‘청춘교실’(감독 김수용), ‘가정교사’(감독 김기덕), ‘성난 능금’(감독 김묵)으로 발아한 한국 청춘영화의 꽃을 활짝 피운 작품이다.
반항기 가득한 가죽잠바 차림의 남자 주인공과 청순미를 자랑하는 비련의 여인으로 청춘영화의 전형을 보여준 ‘맨발의 청춘’은 5년간 ‘떠날 때는 말없이’(1964년), ‘연애 졸업반’ ‘만가’(1965년), ‘초우’(1968년) 등 유사 작품들을 양산 해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들 영화에 당시 젊은 관객들은 열광할 수 밖에 없었고, 스크린은 생동감이 가득찬 젊음의 창구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60년대 중반 붐을 이룬 청춘영화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태양족 영화’를 모방하거나 표절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한국일보도 "청춘영화의 대부분이 실은 바다 건너의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태양족 영화’는 1956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愼太郞)의 베스트셀러 ‘태양의 계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 유래했다. 이시하라 신타로의 동생 이시하라 유지로(石原 裕次郞)가 주연을 맡은 ‘일그러진 과일’(1956년)이 대표작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일본 신세대의 허무주의와 방황하는 삶을 담았다. ‘맨발의 청춘’은 일본의 청춘영화들 중에서 ‘흙탕 속의 순정’(1963년)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표절 여부를 떠나 ‘맨발의 청춘’이 젊은이의 아픈 정서를 정확히 대변해준 한국영화의 대표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70년대는 ‘고교얄개’(1976년)로 대표되는 청소년 영화의 열풍 속에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년)과 ‘병태와 영자’(1979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년)이 청춘영화의 맥을 이어갔다. 하길종 감독은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를 필름에 담아 억압적 사회분위기에 대한 저항의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80년대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년). ‘바람 불어…’은 경제성장으로부터 소외된 젊은이들의 삶을 낭만이 배제된 사회성 짙은 영상으로 보여주었고, ‘고래사냥’은 전두환 정권의 압제 속 대학생의 자아찾기를 유쾌하게 그려냈다. 1997년 개봉한 김성수 감독의 ‘비트’는 ‘맨발의 청춘’의 적자격. 주먹세계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남자와 부자집 딸 사이의 사랑과 방황을 감각적인 촬영기법으로 담아내 젊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라제기기자
◈그때 한국일보에는
신성일(서두수), 엄앵란(요안나) 등 당대 청춘스타가 주연 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은 64년 2월 29일 서울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서두수의 뒷골목 동생으로 나오는 트위스트 김(아가리 역)은 현란한 춤솜씨로 깜짝 스타로 발돋움하였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트위스트가 유행했다. 가수 최희준이 불러 히트 시킨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로 시작하는 동명 주제곡은 지금도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유행가로 남아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산업화의 초입에 들어선 64년은 10%를 상회하는 실업률이 말해주듯이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대졸자들도 독일 광부가 되기 위해 100대1의 경쟁을 통과해야만 했다. 4.19혁명을 거치며 기성세대와 다른 세계관을 형성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출구 없는 현실에 괴로워 하던 젊은이들. 사회 통념을 벗어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과 두 연인의 죽음을 다룬 영화는 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해 3월 8일자 한국일보 ‘휴일 데스크’ 칼럼은 ‘고무신서 하이힐로’라는 제목에서 "신성일 엄앵란 콤비의 청춘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며 "관객의 주성분이 ‘고무신’으로 불려지는 사십대 아주머니에게서 발랄한 이십대로 이행, 관객의 평균 연령이 젊어졌다"고 지적해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알리고 있다. 또 "영화 속의 불행한 얘기를 보고 자신의 불행을 자감케 하는 신파보다 건강하고 향락적인 청춘 멜로드라마가 흥행성을 갖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실린 ‘맨발의 청춘’ 광고문구 역시 영화가 젊은 지성들을 겨냥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아카데미(극장)가 또 전지성(全知性) 여인에게 갈등을 호소하는 문제 애정극… 순정 앞에 돈도 지위도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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