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이 낼 수 있는 적정속도부터 점검하게 됩니다. 운동장을 몇바퀴 돌다보면, 어느 정도의 속도를 유지해야 ‘꾸준히’ 달릴 수 있는지 감이 오게 됩니다. 대회에 나가도 이 속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욕심을 냈다가는 얼마 달리지 못하고 포기하기 십상입니다. 대신 평소에 자신의 적정속도를 높이기 위해 훈련을 해야겠죠.
한 나라 경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라토너의 적정속도처럼, 국가경제가 무리 없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바로 ‘잠재성장률’이라는 적정 성장속도 입니다. 마라토너의 기본 체력과 기술이 적정속도를 결정하듯, 잠재성장률은 그 나라 잠재성장력(잠재GDP)의 증가율입니다. 잠재성장률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추정하는 반면 실질성장률은 실제 한 해에 달성한 실질GDP의 전년 대비 증가율을 말합니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의 요체는 경기순환적 요인보다 중장기 성장잠재력이 하락할 지 모른다는 우려감"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성장잠재력과 잠재성장률이 어떻게 결정되길래, 이런 지적이 나오는 것일까요.
◆ 경제의 바로미터
속도위반을 한 마라토너처럼, 경제에서도 고성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잠재성장률 이상의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어딘가 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고성장으로 소득이 늘어나 소비가 급증하면 임금 등 물가가 급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업이 적정수준 이상으로 한꺼번에 많은 인력과 설비를 확충해야 하기 때문에, 소위 총수요 압력이 높아지는 것이죠.
반대로 실질성장률이 잠재성장률에 못미치면 투자가 위축되고 실업자들이 늘어납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그 나라의 성장잠재력 자체가 축소되고 결국 잠재성장률 수준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 무엇이 잠재성장률을 좌우하나
한 나라 경제가 성장하려면 노동(취업자)과 자본(기계설비) 등과 같은 생산요소의 투입이 꾸준히 늘어야 합니다. 또 생산요소를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느냐도 성장잠재력의 또다른 근간입니다. 이를 생산성이라고 하는데, 요소 투입에 비해 산출이 얼마나 큰가를 나타냅니다.
생산성은 그 나라 기술이나 정책, 제도와 관련이 깊습니다. 기술수준이 높을수록, 또 개인과 기업이 지식을 익히고 신제품 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유인체계일수록 산출도 많아집니다. 사람도 자본도 고성장 부문으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돼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이뤄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경쟁’과 ‘투명성’이 필수적입니다. 쓰레기 같은 기업이 도태되기는 커녕 은행대출을 받아 덤핑을 한다면 좋은 기업까지 위험해집니다. ‘대외개방’이 강조되는 것도 경쟁을 촉발하고, 투명성을 강화하기 때문이죠.
경제가 발전할수록 생산요소 투입량보다 생산성 제고가 더 중요합니다. 요소 투입량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KDI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1980년대 7.8%에서 90년대 6.3%로 하락했습니다. 무엇보다 취업자수 증가율이 둔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도 ‘요소투입형’ 경제에서, 생산성 제고가 성장의 동력이 되는 ‘혁신주도형’으로 바뀌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기관마다 전망이 다른 이유
국민 대부분이 5%대라고 믿고 있던 잠재성장률을 삼성경제연구소가 4.0%라고 전망해 논란이 됐습니다. 1996~2003년까지는 5.4%였지만, 2004~2010년에는 4.0%로 떨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5~6%의 ‘고성장’을 하는 것이 오히려 탈이 될 만큼 한국의 성장잠재력은 오그라든 것이 됩니다. 고용창출이나 소득 2만불 달성도 그만큼 요원해집니다.
한국은행이나 KDI는 구조개혁과 대외개방 성공 여부에 따라 낙관론과 비관론 두가지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2004~2008년 4.1~5.6%, KDI는 2003~2007년 4.8~5.4%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낙관과 비관의 중간이 5%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3개 기관 모두 요소투입 증가율이 떨어져 잠재성장률을 갉아먹을 거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고령화가 필연적 현상이고, 외환위기 이전처럼 공장설비를 대규모로 늘려 성장할 수도 없기 때문이죠. 차이는 생산성 증가율 추정입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요소투입의 잠재성장률 기여도가 2.3%에서 2.0%로 소폭 떨어지는 데 반해, 생산성 기여도는 3.1%에서 2.0%로 낮아진다고 봤습니다. 한은은 생산성 기여도가 1.7%에서 1.5~2.3%, KDI는 1.6%에서 1.5~2.0%로 변화할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정부가 삼성경제연구소에 대해 억울하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열심히 시스템 개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는 미래 신산업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고, 기업가 정신이 위축됐으며, 우수인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
◆ 성장잠재력 제고 방안에서도 시각차
성장잠재력 제고를 위한 전략은 다양합니다. 절제되고 예측가능한 정부를 만들고, 교육시장을 개방해 우수인력을 공급하며, 연구개발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겁니다. 정규직의 노동유연성 확보도 시급한 과제로 지적됩니다. 그러나 정부나 각 기관들이 내놓는 전략을 보면 차이가 두드러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빈부간, 지역간 균형발전에 대한 것과 시장개혁 부문입니다.
최근 서울대 국가경쟁력연구센터 심포지엄에서 이근 서울대 교수는 ‘4대 1만 달러 함정’과 ‘4대 2만 달러 전략’을 발표했습니다. 이 교수는 ‘영미식 모델의 함정’과 ‘분배 욕구의 함정’을 들어 "이제 선진국이 됐다는 생각에서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영미식 모델 추종은 보수 경영 및 저투자를 촉진하고, 분배 욕구의 팽배로 성장잠재력을 훼손한다는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주장도 유사합니다. 반면 정부는 ‘시장개혁’과 ‘민생안정·복지확충’, ‘국가균형발전’을 국가 7대 전략에 포함시켰습니다. 글로벌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기업시스템을 정착해야 경제의 시스템 리스크를 해소할 수 있고, 분배구조를 개선해야 국민들의 경제활동 의욕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전략이 다르면 결과도 다를 수 밖에 없는데, 과연 한국적 현실에는 어느 쪽이 더 맞을까요.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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