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교등급제에 관한 논란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파문이 컸던 이유는 고교등급제에 대해 대학과 교육부 및 시민단체의 해석이 상이했고, 그 사안이 학생들의 대학 입시 당락을 결정할 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교육의 목표가 대학 입시를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입시는 특수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부당하게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 수험생들의 분노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그러나 대학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고교등급제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음을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된다. 본래 수시모집은 성적순이 아니라 다양한 적성과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고교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내신과 교외활동 등을 주요 근거로 학생들을 선발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학생들의 내신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어 적절한 평가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 과목에 1등이 100명 이상인 경우가 허다하고 학생 전원이 수를 받는 과목이 11개에 달하니 내신을 그대로 적용하여 우수한 학생들을 선별하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이다.
물론 우수한 학생들을 선별하는 근거로 출신 고교를 선택한 것은 잘못일 수 있으나 이는 방법론상의 문제일 뿐이며 우수 학생을 선별하려는 대학의 노력은 비판 대상이 아니다. 이를 간과한 채 ‘강남 대 강북’이라는 경제력 격차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조장할 뿐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철저한 경쟁을 근간으로 한다.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선별하여 사회적으로 좀더 합치되는 가치에 더 높은 보상을 하여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경쟁의 목적이다. 따라서 모든 경쟁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낳는다.
정당한 이유에 근거한 차별이라면 문제가 될 수 없으며, 특히 교육에 있어서는 경쟁이 더욱 더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의 동력은 질 높은 인적자원뿐이다. 우리가 이루어냈던 고도의 경제성장은 높은 교육열로 인한 양질의 인력자원 때문이었으며, 인적자본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현대의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는 것은 과거와 같은 대량생산이 아니라 우수한 아이디어, 혁신, 정보체계 등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수의 뛰어난 인재들이다. 교육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형성하려 한다면 경쟁을 통해서 더 효율적으로 우수한 엘리트를 양성해야 한다.
우리의 경우, 교육이라는 것은 경쟁의 결과로 성취해야 하는 목표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제공되어야 하는 공공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의 교육 또는 교육기회의 보장은 정부가 제공해야 하는 사회보장체계 안에 있지만 개개인의 교육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가의 문제는 순전히 개인의 능력에 기초하여 차등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교육에 있어서의 평등이 ‘기회의 평등’에 한정되지 않은 채 ‘사후적 결과의 평등’을 의미한다면 비효율적인 자원배분과 하향평준화를 낳는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끊임없이 뛰어야만 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붉은 여왕’이 등장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세상의 속도에 맞춰 변화해야 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속도 이상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경쟁의 본질적 가치를 부정한 채 그 결과만을 취하려는 것은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이다. 현재의 정보화사회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인 무한경쟁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피할 수 없다면 결과의 평등을 꾀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 차이를 구분하고 선별하는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 공정한 룰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조하현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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