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이 제작해 선보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모처럼 오페라 보는 재미를 준다. 가수들의 열창과 열연에 후끈 달아오른 객석에서 고급스럽고 세련된 무대를 지켜보는 즐거움으로 눈과 귀가 모두 만족스럽다. 10~20년 유럽에서 활동하며 국내무대와는 떨어져 있었던 가수들을 남자 주역들로 만나는 신선함도 빼놓을 수 없다.23일 저녁 마지막 공연을 남겨둔 이 작품은 필리포 산주스트가 연출한 도이체 오퍼 베를린의 1980년 프로덕션. 초연이후 20년도 더 됐지만, 낡은 느낌은 전혀 없다. 산주스트가 직접 디자인한 무대는 별도 구조물 세트를 세우지 않고 천에 그린 그림으로 회화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데 간결하고 차분하면서도 아름답다.
원수집안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 낭만적인 오페라의 하이라이트는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여주인공 루치아가 첫날 밤 신랑을 죽이고 칼을 든 채 나타나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 비통함과 절망으로 미쳐버린 루치아의 처절한 노래가 20분 가까이 이어지며 관객의 숨을 멎게 한다.
두 루치아, 소프라노 김성은과 로라 클레이콤은 훌륭한 노래와 연기로 갈채를 받았다. 소프라노에게는 지옥의 시험대처럼 끔찍하지만, 관객들로서는 전율의 순간이 될 ‘광란의 아리아’에서 두 가수의 노래는 소름끼칠만큼 굉장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20일 개막무대에서 로라 클레이콤이 보여준 놀라운 성악적 테크닉과 연극배우 뺨치는 연기도 감탄스러웠고, 둘째날의 루치아 김성은이 그려낸 서정적이고 비단 같은 음색의 루치아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루치아의 연인 에드가르도 역의 두 테너 박기천과 나승서, 루치아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오빠 엔리코 역의 바리톤 서정학에게 이번 공연은 금의환향의 무대이기도 하다. 셋 모두 멋진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고음을 힘들이지 않고 시원스럽게 뽑아내는 박기천의 노래는 연기가 좀 뻣뻣하다는 결점을 잊게 할만큼 매력적이다. 반면 나승서는 가슴이 아리도록 섬세한 표현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서정학의 풍부한 성량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냉혹하고 야심에 찬 젊은 영주답지 않게 가끔 들뜬 모습을 보이거나 다른 가수들과의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를 무시한 채 혼자 튕겨 나오는 것은 자신감이 지나친 탓은 아닐까. 공연은 23일 김성은-나승서 팀의 무대로 막을 내린다.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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