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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입력
2004.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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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배고프게 끝나고 나면 그 허기는 환상이 채우고, 짧은 기억은 ‘만약에…’라는 가정법으로 뒤덮인다. ‘그 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더 잘해 줬더라면…’ ‘그 때 그(그녀)와 함께라면 지금 더 행복할 텐데…’ 가을, 두 편의 영화 ‘비포선셋’(Before Sunset)과 ‘이프온리’(If Only)가 그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비포선셋’의 셀린느 눈으로 바라본 사랑

"나 변했지?" "머리 스타일이 변했어. 머리 풀어봐. 좀 마른 것 같네. 난 변했니?" "아니…그런데 주름은 좀 있네."

9년 전 비엔나에서 만났을 때 너는 방황하는 보헤미안 청년 같았고, 나는 ‘청순함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20대였어. 나는 환경운동하는 노처녀고, 너는 우리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네. 너는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그래도 4년 결혼생활 동안 아내와 잔 게 10번도 안된다는 말은 과장 아니니.

"왜 안 왔어. 왔으면 모든 게 변했을 텐데." 6개월 뒤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원망하지만 생각해 봐. 사랑에 있어 ‘만약에’라는 가정법은 부질 없어. 다시 만났으면 지금도 행복할 것 같아? 그 때 서로 연락처를 묻지 않은 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야. 매일 연락하다가 서서히 멀어질까 봐.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못 만나도록 장난치는 게 사랑이고 어떻게 해도 못 만날 사람을 다시 만나도록 요술 부리는 게 사랑이야. 지금 우리는? 비행기 출발시간이 코앞인데도 너는 나를 따라 왔어. 너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다시 너를 사랑하고, 9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연인이 되는 걸까? 아직 잘 모르겠네. 그러면 뭐 어렵니. 6개월 뒤 만나자 약속하고 못 지키면 9년 뒤에 다시 만나지 뭐.

◆‘이프온리’의 사만다 눈으로 바라본 사랑

사랑은 당신에게 외국어와 같아.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어. 3년 동안 준비한 나의 졸업 연주회도 잊고 있잖아. 황급히 "왜 모르고 있겠어. 모르는 척하기 농담이야"라고 둘러대는 모습이라니. 비서를 시켜 준비하는 선물이라고는 빨간 스웨터. 이미 나에게 빨간 스웨터가 있다는 건 당신 비서도 아는 사실이야.

당신은 늘 계산만 했어. 일과 나를 가운데 두고. 아침에 내가 예쁜 속옷 입고 눈웃음 쳐도 "유혹에 넘어가는 게 남는 걸까 서둘러 회사로 향하는 게 남는 걸까" 를 저울질 했지. 다투고 헤어져 내가 택시에 올라탔을 때도 "같이 택시에 오르는 게 나을까, 그냥 보내는 게 나을까" 계산만 하고 있었어. 당신의 불행은 너무 오래 계산했기 때문이야.

시간을 되돌리기 바라던 당신 앞에 정말 하루가 되돌아 왔어. 엉망진창이었다가 결국 당신 눈앞에서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던 끔찍했던 어제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거지. 당신은 달라졌어. 나의 졸업연주회 때는 단상에 올라 와 사랑고백도 하더라. "그녀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사시오. 계산없이 사랑하시오." 택시기사의 충고대로 당신은 변했고, 가장 멋진 하루를 나에게 선물했어.

그런데 이제 어쩌지? 이제는 내가 당신을 잃어버렸으니.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으니. 늘 마지막인 것처럼, 내일 다시 못 볼 것처럼 열심히 사랑할 걸 그랬어. 최지향기자 misty@hk.co.kr

■닮은 꼴 두 영화 / 유럽의 가을 배경…주인공의 제작 참여도

영화 ‘비포선셋’(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과 ‘이프온리’(감독 길 영거)는 아름다운 유럽의 가을을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라는 점이 닮았다.

‘비포선셋’에서 제시(에단 호크)가 기자회견을 하는 장소는 파리의 유명한 서점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921년 문을 연 이 서점은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문학을 유럽에 처음 전파한 곳이다. 영화 속 제시 역시 미국작가로 등장한다. 세느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장실, 계단 등 틈이 있는 곳마다 책을 전시해 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시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서점을 나와 파리의 명물인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유람선에 올라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프온리’ 역시 2000년 구 시청 앞에 세워진 대관람차 ‘런던아이’ 등 런던의 명소를 화면 가득 선보인다.

두 영화는 유럽인과 미국인의 사랑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비포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각각 미국인, 프랑스인이다. ‘이프온리’에서 사만다(제니퍼 러브 휴잇)는 영국에 유학 온 미국인이고, 이안(폴 니콜스)은영국인이다. 주변사람들은 "프랑스 여자 조심해라" "미국 여자는 헤프다"며 편견을 드러내지만 사랑 앞에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제작에 깊숙하게 관여했다는 것도 공통점. ‘이프온리’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로 스타덤에 오른 제니퍼 러브 휴잇이 직접 제작한 영화. 로맨틱한 영국 신사 분위기로 제2의 휴 그랜트라 불리는 신인배우 폴 니콜스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도 휴잇이었다. ‘비포선셋’은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함께 각본을 썼다.

가을을 따뜻하게 할 로맨스로도 두 영화는 손색이 없다. 다만, 젊고 뜨거운 사랑에 대한 열병을 안겨 줬던 ‘비포선라이즈’의 속편이라는 점에서 ‘비포선셋’에 대한 관객의 기대가 좀 더 유별나다. 우마 서먼과의 결별 후 마음 고생으로 에단 호크는 폭삭 늙었고, 줄리 델피의 청순미도 세월에 묻혀 버렸지만 두 배우는 여전히 지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비포선라이즈’ 때는 "그들은 정말 다시 만났을까, 아닐까?"라는 궁금증을 안겨 주더니, ‘비포선셋’에서도 "그들은 다시 사귈까?"에 대한 답을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 뒀다. 29일 개봉. 최지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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