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말이 있다. 어렵게 선을 보인 국가보안법, 과거사 기본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등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법안이 그러하다. 이들 법안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아 기대에 못 미친다. 그 결과 개혁법안에 기대를 걸었던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역시 열린우리당과의 공조에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섰다.물론 이 법안들에 대해 한나라당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고 시민사회 수준에서도 냉전적 보수세력의 반발이 거센데다 중립적인 국민들 여론 역시 경제를 이유로 그리 곱게 보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 내도 예를 들어 국보법 폐지 반대론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하면 열린우리당이 타협적인 법안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법안들이 발표되자 너무 미온적이라는 진보진영과는 대조적으로 냉전적 보수세력은 급진적이라며 결사 저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열린우리당은 좌우에서 샌드위치가 된 형국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법안들은 문제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에 대해 단순히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법안을 만드는 방안, 형법에 보완하는 방안 등 4가지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17일 의원 총회에서 형법의 내란죄를 강화하는 제 1안을 채택했다. 물론 그나마 명백한 개악인 대체입법안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국보법은 진보, 보수를 넘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할 법으로 진보와는 거리가 먼 대한변호사협회 내 국보법위원회 위원 10명 중 9명이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이미 16년 전에 낸 바 있다.
최근에도 한국형사법학회, 한국형사정책학회, 한국비교형사법학회 등 대표적인 3개 형사법학회가 국가보안법은 현행 형법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므로 다른 보완조치 없이 폐지해야 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네 안은 모두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현재의 국보법보다도 악용의 소지가 많은 개악의 요소까지 안고 있다는 것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분석이다.
그 결과 국가보안법 연구의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은 지금처럼 국가보안법을 없앴다는 생색만 내고 실제로는 대체입법 등을 통해 독소조항을 재생시키느니 차라리 국보법을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미 인권 침해로 정당성을 상실하고 사문화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그냥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란목적단체라는 새로운 규정 등을 통해 형법으로 보완하는 것은 다 죽어가는 공안 논리, 냉전 논리를 재생시켜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수많은 인권 말살로 날이 다 닳아 쓸모없게 된 헌 칼을 받고 새 칼을 내주는 것으로 "두껍아, 두껍아, 헌 칼 주면 새 칼 줄게"라는 식의 노래를 듣는 기분이다.
미국 건국 당시 북부의 연방주의자들과 남부의 반연방주의자는 여러 문제에서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루었지만 마지막 문제를 놓고는 합의를 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것은 노예 문제로 남부는 인구 즉 유권자 수를 늘리기 위해 노예도 사람이라고 주장한 반면 북부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타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노예는 ‘5분의 3 인간’이라는 코미디 같은 헌법 조항이다. 다시 말해 다섯 명이 세 표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타협이라고들 하지만 노예는 5분의 3인간이라는 식의 타협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도 타협이라는 이름 아래 노예는 5분의 3인간이라는 식의 법을 만들 수는 없지 않는가?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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