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페스티벌이 열린 15일 오후 2시 관악노인종합복지관 야외무대. 아코디언과 기타를 둘러멘 정장 차림의 실버연주단이 무대위로 올라서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소리가 터져 나왔고 손을 흔들며 수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리를 잡고 기타줄을 고르며 잠시 소리를 점검하던 연주단은 빵모자를 단정하게 눌러쓴 반장 함봉환(72)씨의 주도로 ‘차렷 경례’를 올리더니 이내 연주에 들어갔다.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된 연주는 ‘그리운 내 님이여’, ‘홍도야 울지마라’로 이어지며 객석을 후끈 달궜다."어휴, 소리가 좋았는지 모르겠어요. 전엔 연주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요즘엔 연주보다 오히려 객석에서 소리가 잘 들렸는지가 걱정된다니까요."
다음 출연자들을 위해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내려온 연주단원들은 등뒤로 쏟아지는 박수와 앙코르 소리에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짐짓 음량이 적절했느냐고 되묻는 품새가 연주와 객석반응에 무척 만족스러운 눈치다. 한 달이면 두 차례씩 경로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정기연주회를 갖는 준 프로급 연주단이지만 무대에 설 때마다 늘 새롭고 설렌다.
실버연주단은 2003년 봄, 처음 결성됐다. 관악노인종합복지관이 2002년 실시한 아코디언교습반이 모태다. 음악의 즐거움에 새삼 눈뜬 8명이 어느날 ‘실버밴드를 만들어 노년에 음악봉사활동을 하자’고 의기투합, 이듬해 봄 복지관 노인들을 대상으로 첫 데뷔연주회를 가졌다. 반응은 뜨거웠다.
"노인들이 아코디언에 기타반주를 곁들여 연주하니까 너무 좋아해. 더구나 음악도 흘러간 옛노래 위주로 선곡해서 심금을 울리거든. 요즘에는 양천구, 서대문구 등 다른 곳 노인이나 가족관련 행사에서도 우리를 초청하는 경우가 많아. 말년에 음악가 꿈을 이뤘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딨어." 함봉환씨 얘기다.
연주단은 남성 5명, 여성 3명으로 이루어졌다. 전직도 행정공무원, 자영업, 미용사, 전업주부, 선교사, 유치원 보모 등 다양하다. 멤버는 기타 2명에 아코디언 6명으로 단촐하다. 누구도 직업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다들 치열했던 삶의 한 구비에 노래 혹은 음악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공통점이 있다.
청소년기 가수를 꿈꿨다는 홍정희(72·전직 행정공무원)씨는 "젊은 시절 직장다니고 애들 키우느라 ‘끼’ 부릴 틈이 있나요. 처음 아코디언 교습반 공고 보고서야 머리속에 뭔가 번쩍 지나더라고. 가수의 꿈이나 무대체질, 뭐 그런 거죠. 정말 열심히 배웠어요."
연주단의 ‘막내’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안옥순(62·미용사)씨는 이날도 검은 정장투피스에 하늘하늘한 레이스천을 폭넓은 칼라처럼 목에 두르고 등장, 박수를 한 몸에 받았다. 서른살에 혼자 되서 아들 둘을 미용가위 하나로 키워낸 철 의 여인. 전국노래자랑에 두번이나 참가해 입상할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지만 악기는 난생 처음 배워왔다.
"악보는 커녕 콩나물 대가리도 몰랐어요. 그래도 그냥 음악이 좋으니까. 무대에 서면 정말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 것처럼 가슴이 설레요. 항상 공연하는 날이 기다려져요."
매주 목요일 모여 소리를 맞추는 실버연주단의 고정 레퍼토리는 60여곡. 악보만 있으면 80곡 정도는 무난하게 연주할 수 있다. 무대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모르는 신청곡이 나와서가 아니라 연주를 할 때 음정 박자와 상관없이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음악속에 농익은 황혼인심은 음악 고집 대신 객석의 흥에 맞춰 박자를 따라가준다.
음악단장 장길성(64·아코디언 강사·전직 선교사)씨는 "노년에 음악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 건강은 물론 남을 위한 봉사로도 너무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며 "실버악단이 숨겨진 끼를 맘껏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더 많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버연주단은 24일에는 롯데백화점 관악지점이 주최하는 야외음악회에도 출연한다.
글·사진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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