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길, 광릉 국립수목원에 들어서면 ‘참 좋은 계절이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고 주변 나무들의 빛깔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집니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 흩날려 떨어지는 낙엽을 보노라면 마음까지 흩어집니다.이즈음 자연의 변화는 누구에게나 인상적인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오는 친구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산책 길에 나무를 보고 제 생각이 났다며 나무 한 그루가,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그 나무에 매달린 잎새 한 장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고 때론 처연하기도 하답니다.
이런 감상은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를 읽으며 사소한 변화에도 설레던 사춘기 소녀들만의 것도,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한 청년들만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 가을 새삼 알았습니다. 고단한 삶에 지쳐 잠시 감춰뒀을 뿐이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설레임이나 감동은 나이와 성별에 무관하다는 사실을요. 서두가 긴 것을 보니 저 역시 가을이 주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할까요. 한 남자가 길을 나섰습니다. 은행을 털려구요. 은행을 털다니, 하고 의아해하시겠지만, 이 사람은 은행에 들어가 돈을 털려는 것이 아니고, 길가에 서있는 은행나무 열매인 은행을 털어 주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막대기로 은행나무를 쳐서 열매를 떨어뜨려 줍다가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라던 아내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털어 주은 은행을 차에 싣고 간 그가 진짜 은행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쳐다보며 피했습니다. 은행에서 나는 독한 냄새가 이 남자에게 배었기 때문이지요.
자동인출기에 선 남자는 주변의 시선에 당황한 탓인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아내에서 전화를 걸어 소곤거렸지요. "내가 은행을 털러 왔다가…." 땀을 흘리고 주변을 힐끔거리는 남자가 은행을 턴다는 말을 하자 급기야 신고가 되고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남자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지만 한 가지 범죄사실이 드러나 벌을 받았습니다. 바로 도로교통법위반입니다. 도로시설물의 하나인 가로수를 함부로 손대 이 법의 저촉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은행나무 열매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은 외종피(外種皮)때문입니다. 즉 살구색을 닮은 겉껍질(은행나무 이름도 여기서 얻었습니다. 살구를 닮아 살구 杏(행), 그 속껍질은 은빛처럼 희어 銀(은)이라나요)에 빌로산과 은행산을 함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냄새지요. 냄새뿐만 아니라 피부가 약한 사람은 피부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은행나무로서는 미래의 은행나무로 클 은행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요.
함부로 길가의 은행을 터는 것은(자기 집안에서 키우는 은행나무의 은행을 따는 것은 누가 뭐라 겠습니까)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은행을 얻으려면 나무를 흔들고, 막대기로 때리고 심지어 돌로 치기도 하지요. 그 과정에서 나무줄기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흔들립니다. 가뜩이나 도시의 땅속은 갖가지 시설물로 나무가 뿌리내릴 흙이 없는데 말 그대로 뿌리 채 흔들리니 여간 위협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해 무조건 법으로 막기보다 나무의 피해를 줄이고 사람들도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요즘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은행줍기 행사도 합니다. 공무원 혹은 고용된 사람이 공식적(?)으로 은행나무 위에 올라가 나무를 흔들어 은행을 밑으로 떨어뜨리면 주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배낭에나 종이백에 은행을 주워 담는 것이지요.
은행나무를 두고 변한 것은 그 뿐이 아닙니다. 낙엽 밟는 길을 만든다며 예전같으면 치워버리던 낙엽을 그냥 두기도 하고, 처치곤란이던 낙엽을 약의 원료로 수출한다고 모아 팔기도 합니다. 은행나무의 경우 암나무만 소득증대의 가치가 있다고 심다가 다시 고약한 냄새로 가로수로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숫나무만 가로수로 심기도 하고, 이젠 소득보다 재미와 건강이라는 이유로 은행 따는 일이 중요해져 다시 암나무를 선호하고….
서울만 해도 은행나무 가로수는 전체 가로수 약 27만 그루의 40%에 달하는 11만 그루나 된다고 합니다. 은행나무 이야기를 한참 해드렸으니 이제 길에서 만나는 은행나무, 한번 더 바라봐 주시겠지요. 이 은행나무 하나 마음에 잘 갈무리해도 넉넉하고 충만한 가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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