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시어머니 곁에 어린 자식들을 몰아놓고 장사 나간 홀며느리의 귀가가 늦어진다. 어두운 밤, 산길 넘어올 며느리가 걱정스러운 시어머니는 그예마중을 나선다.“엄니, 지금 어디 계시오?” 어둠 속 저 멀리서 무서움기를 떨치려는 듯한 며느리의 부름이 들리고, 시어머니는 “오냐. 나 여기 있다! 천천히 오거라”한다. 머릿짐을 받아 인 시어머니가 앞장을 서고, 뒤따라가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부른다. “엄니, 이젠 더 나이도 묵지 말고 늙지도 마시오 이?”(‘꽃 지고 강물 흘러’)
올해로 등단 40년인 작가 이청준 씨가 화수분 같은 그의 삶의 이야기 보따리를 슬며시 끌러 중ㆍ단편 6편을 엮었다. 새 소설집 ‘꽃 지고 강물 흘러’에서 그는 지난 시절의 소설 제목처럼 ‘낮은 목소리’의 담담함으로 묵직한 삶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의 장편소설 ‘축제’의 후일담으로 읽히는 표제작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시골 옛집을 지키던 형수와의 갈등과 화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한 시절 그 살갑던 고부의 정이 노모가 치매기를 보이면서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며느리(형수)의 박정함에 ‘나’는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어느 날 고향을 찾은 ‘나’는 콩단 한 짐을 이지 못해 노모의 유택에 기대둔 채 기진한 형수의 노구에서 노모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속으로 뇐다. ‘형수라도 이젠 더 늙지 말라’고.
그는 작품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 덮여 있던, 허투루 여길 수 없는, 삶과 현실의 비의들을 담아 냈다. ‘오마니!’에서는 영화 ‘축제’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형식을 빌어 ‘젖품내’로 상징되는 유년의 모성에 대한 목마름 한자락을 풀어놓더니, ‘들꽃 씨앗 하나’에서는 명분과 당위에서 멀찍이 떨어져 흘러가기 쉬운 애처롭고 신산한 우리네 삶을 감싸안는다.
작가는 그의 40년 문학여정이 보여주듯, 이번 작품들을 통해 이런 말을 하는 듯하다. “삶이 있는 한 문학도 건재할 것이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우리는 문학에서 위로와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야 삶이고, 그래서 문학입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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