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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근본주의의 범람

입력
2004.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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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이상한 버릇 하나가 생겼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그 내용과 구체적 현실이 어떻든 계층이나 이념, 윤리나 사회정의 문제로 환원해 바라본다.이런 시각은 복잡한 현상을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하지만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의 사회적 논의로 번질 때는 적잖은 위험성을 띤다. 인간의 주체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게 되고,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처방을 부른다.

일부 대학의 ‘고교 등급제’ 시행을 둘러싼 논란이 한 예다. 현행 고교 평준화 및 대학입시 제도 안에서 대학이 가질 수 있는 자율성의 범위에 대한 논란 정도면 충분했다. 그것이 ‘강남 우대ㆍ비강남 차별’이 거론되며 계층 간 갈등을 부각하고, 평준화 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으로 번졌다.

그러나 강남에서도 ‘교육 1번지’로 통하는 대치동이 결코 ‘소득 1번지’가 아니라는 실상을 알고 보면 이런 논란이 허전해 진다. 대치동 주변에는 ‘명문’ J고, D고 등과 학생의 10분의 1 가까이가 특목고에 가는 ‘특급’ 중학교, 학습ㆍ입시 전문학원이 밀집해 있다.

그런데 막연한 선입견과 달리 대부분 13~35평형인 일대의 아파트는 많이 낡았고, 세입자 비율도 높다. 프리랜서 작가 김은실씨는 ‘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이란 책에서 대치동 엄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소득이 아니라 자녀교육에 대한 태도에서 찾았다.

구체적 현실을 본질적 문제로 환원하려는 태도는 토론을 사전 배제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크다. 예컨대 교육문제를 사회정의 차원에서 논의하는순간 답은 이미 정해진다. ‘평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를 누가 반박할 수있겠는가. 그렇게 강요된 침묵을 통해 나온 답은 문제를 방치ㆍ외면할 뿐해결하진 못한다.

최근 시행에 들어간 성매매 방지 특별법도 사회현실을 윤리문제로 환원한 대표적 예이다. 매매춘의 만연은 사회의 건전성을 해친다. 또 업주의 착취나‘인신매매’ 관행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매매춘을 단숨에 뿌리뽑겠다거나 사회윤리를 명분으로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수많은 종사자들의 밥줄을 끊어도 된다는 발상은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당장 종사자들의 생존권 요구 시위가 잇따르는 한편 오피스텔 등에 은밀하게 파고드는 신형 매매춘이 보고되고 있다.

매매춘을 사회악으로 규정, 세균을 박멸하듯 사회적 병원균도 무조건 척결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적 발상 자체가 위험하고 폭력적이다. 한때 ‘무균질’(無菌質)을 내건 정치인이 있었지만 무균질 사회는 지향점이 될 수 없다.

역사상 무균질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 또는 전체주의 사회였다. 생물 세계에서도 무균질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지나친 위생이 천식과 아토피 피부염 등 알레르기 질환을 부른다는 ‘위생가설’이 힘을 얻고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중요한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사회악의 만연을 막으면 그만이지 뿌리째 뽑겠다는 발상은 곤란하다. 유교 근본주의 사회에 근접했던 조선 초기에도 태종과 세종의 창기(娼妓) 철폐 주장은 각각 하륜(河崙)과 허조(許稠)의 반대에 걸려 좌초했다.

‘해동명신전’에 이름이 오른 두 사람이다. 이들의 반대는 ‘음심(淫心)을 품은 자가 여염집 담을 넘는다’ 는 요지였지만 근절이 불가능한 사회적 병원균은 적절히 제어해야지, 들쑤셔서 사방에 퍼뜨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중신들의 그런 균형 감각이 조선 초기의 사회적 건강을 지탱했다.

현재 우리 경제와 사회가 한 걸음도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것도 근본주의 담론의 범람과 무관하지 않다. 정권 주도세력이 개혁 강박증, 또는 사회적 결벽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미래는 더욱 어두워진다.

황영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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