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웨이(王家衛)는 언제나 눈물을 부르는 감독이다. 뒷골목 인생의 죽음과 서글픈 사랑에 카메라를 들이 댄 ‘열혈남아’(1988년)로 데뷔한 그는사랑의 상처를 주고 받는 인물들이 아픈 추억에 울먹이며 배회하는 모습을감각적인 화면과 음악으로 섬세하게 그려왔다. 그리고 도시(‘중경삼림’‘타락천사’)와 강호(‘동사서독’), 이국의 땅(‘해피투게더’ ‘아비정전’ ‘화양연화’)을 떠돌았던 그의 주인공들은 이제 ‘2046’에서 미래로 방황의 공간을 넓힌다.‘화양연화’에서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못한 수리첸(장만위)과의 사랑이야기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어느 나무 속에 봉해야 했던 차우(양차오웨이)는 싸구려 호텔방에 머무르며 소설을 쓴다. 옆방 2046호에 투숙한 고급 콜걸 바이링(장쯔이)과 장난처럼 사귀면서 육체적 관계를 맺고, 호텔 주인의 딸 등 많은 여자들이 스쳐가지만 차우는 사랑에 냉소적이다. 그는2046호로 난 구멍으로 추억을 되새기고, 그 속에 안주하며 떠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차우가 쓰는 미래소설 ‘2046’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하며 사랑의 미로를 헤맨다.
왕자웨이는 ‘2046’이 ‘화양연화’의 속편이라 말하지만, ‘아비정전’(1990년)과 맞닿은 부분이 적지 않다. 출생의 아픔 때문에 여자의 육체를떠돌면서도 사랑을 주지않는 고독한 아비(장궈롱)와 차우의 애정행각은 일면 동일하다. 엔딩 장면 출연만으로 그쳤지만 강렬했던 ‘아비정전’에서양차오웨이의 모습이 ‘2046’ 상영시간 내내 아른거린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과거를 보상 받기 위해 열차를 타고 끝 모를 여행에 나서는 주인공의 모습도 서로 겹친다.
또한 ‘2046’은 왕자웨이표 스타일이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다시 보여준다. 유려한 미장센이 여전히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고, 귓가를 휘감는 음악이 이미지 과잉에서 오는 지루함을 메워준다. 안드로이드 역을 맡은 왕페이(王菲)의 인공미도 떨쳐 내기 힘든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2046’은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미완성작으로 처음 공개 되었다. 이번에 개봉하는 ‘버전’은 2046년 미래의 모습을 담은 컴퓨터 그래픽을 추가하고 음향과 음악을 새롭게 입혀 재편집을거친 업그레이드 프린트. 부산에 간 왕자웨이 팬들은 입장권 판매 시작 4분53초 만에 매진을 시키면서 그를 열렬히 환영했었다. 궁리(鞏悧), 기무라 다쿠야(木村拓哉) 등 아시아 톱 스타들의 연기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15일 개봉.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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