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오고 있다(Korea is coming)’.6일 개막한 세계 최대규모의 제56회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내년 주빈국으로 선정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빈국 행사를 앞두고 한국관에 우리 출판문화를 알리는 기획전시를 도입해 좋은 반응을 얻은 데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조직위원회가 ‘직지(直指)’를 내세운 홍보관까지 마련해 각국 출판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국관에는 개막 첫날 독일 문화전문방송인 ‘3sat’를 비롯한 현지 언론의 취재도 눈에 띄었다.
◆주목 끄는 한국관과 주빈국 홍보관=매년 국내 출판사 전시 부스를 모아놓은 정도였던 한국관은 올해는 ‘한국출판문화역사전’ 등 기획 전시를 5가지나 마련했다. 출판문화역사전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 다라니경’,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직지’ 활자본을 비롯해 한국출판 1,300년의 역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5개 시기로 나누어 소개했다.
또 ‘한국의 명시전’에서는 한용운 정지용 김소월 윤동주 김수영 서정주 등 시인 10명의 영어로 번역된 대표시를 골라 작가 사진ㆍ연보와 함께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북아트 작품과 국내 전자책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국의 전자책 10선’ 전시도 눈에 띈다.
‘한국이 오고 있다’를 제목으로 내건 내년 주빈국 홍보관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 ‘직지’가 청주 근처의 절에서 조용히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했다.
직지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 경계를 넘어섰’고 그렇게 ‘발달한 인쇄ㆍ책문화를 일궈냈던 한국’이 이제 2005년 도서전의 주빈국이 된다는 내용으로 단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7일 열린 한국 주빈국 행사설명회에서는 남북공동행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폴커 노이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조직위원장은 “북한정부에 참여해달라는 초대장을 보냈다”며 “계획한대로 북한 예술인들의 작품을 선보일수 있다면 남북관계개선에 한몫하리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빈국 조직위와 출협의 갈등 여전=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한국 알리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할 수 있지만, 주빈국 조직위와 그 동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한국관 운영을 주도해온 출판협회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출판협회는 이강숙 위원장 사퇴 이후 황지우 조직위 총감독이 내년 행사를 너무 공연ㆍ예술 이벤트에 비중을 두어 이끌어 가는데 대한 불만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출판협회 관계자는 “조직위가 마련키로 한 전체 예산 265억원 가운데 도서 전시ㆍ운영에 쓸 돈은 17억원에 불과하다”며 “주빈국 행사는 엄연히 책을 중심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공석인 위원장 선임, 전체예산 중 절반인 민간 지원금 확보 등도 서둘러 해결해야 할 과제. 내년 행사의 윤곽이 거의 나온 상황이라 프로그램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출협은 예산 조정 등을 통해 도서 전시 규모를 더 강화할 뜻으로, 조직위 체계를 출판물 전시행사와 기타 관련행사를 분리하는 공동위원장 체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새 위원장은 10월 중 선임될 예정이다.
출판계가 주빈국 행사준비 예산지원에 소극적인데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일본이 출판계와 일반기업 출연금으로 10여년 전 주빈국 행사를 성공리에 치러낸 데 비해, 우리 조직위는 아직 165억원에 이르는 민간 지원금 목표액 중 한 푼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국내 출판인 방문 절반 가까이로 줄어=국내의 불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찾던 매년 400명 안팎의 국내 출판인들은 올해는 절반 가까이로 줄었다. 도서전 전체로 볼때는 참가 출판사가 6,691곳으로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독일 이외 나라의 출판사 숫자나 전체 전시 면적이 줄어 위축된 분위기다.
랜덤하우스, 펭귄, 사이먼&슈스터 등 영미권의 대형출판사들이 예년 규모를 유지하고 저작권 상담이 활발했을 뿐,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전시장을 축소운영하는 모습이다.
도서전 조직위는 ‘영화&TV관’ 등 영상ㆍ출판산업의 교류, ‘디지털시장’ 등 차세대 출판기술 등을 부각시켰지만 예년과 큰 차별을 찾기는 힘들다. 게다가 독일 경제가 물가와 실업자문제 등으로 꽤 오래 불황에 허덕이는 형편이어서 전시장 주변에서도 별난 활력을 볼 수 없다.
◆올해 도서전 주빈국인 아랍세계의 모습=이례적으로 주빈국이 한 나라가 아니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이라크 등 아랍권 22개 국가연합으로 마련했다. ‘미래의 비전(Visions of Future)’을 주제로 주빈국관과 개별 국가관에서 아랍의 출판과 과학, 문호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행사가 여럿이다.
지난해 러시아에 비해 규모는 적지만 차분하고 안정적인 구성이 인상적이었고, 개막 첫 날에는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방문해 전시장을 둘러보는 등 관심을 표시했다.
/프랑크푸르트=글ㆍ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日 오치아이 히로야스 "돈 많이 쓸 필요는 없어"
“돈을 많이 쓴다고 꼭 좋은 주빈국 행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국가를 홍보할 방법은 많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15년 앞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치러냈다. 당시 주빈국 행사의 주체는 일본의 출판문화국제교류회. 대한출판문화협회가 국내외 도서전을 모두 전담하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은 출판협회가 도쿄 국제도서전 등 일본 내의 도서전을 맡고, 해외 전시는 출판문화국제교류회가 담당한다.
현재 일본 출판문화국제교류회 사무국차장을 맡아 해외전시 실무를 총지휘하고 있는 오치아이 히로야스(落合博康ㆍ55ㆍ사진)씨는 30년 넘게 교류회의 국제도서전 참가 업무를 맡아 본 베테랑.
1990년 일본 주빈국 행사에도 물론 참여했다. “일본이 주빈국 행사를 치를 때는 ‘거품경제’로 일본이 대단히 호황일 때입니다. 그래서 행사비용이 막대했지만 정부지원을 거의 받지 않고 출판사가 절반, 일반 기업이 절반을 내어 꽤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던 거죠.”
일본은 당시 10억엔의 돈을 쏟아 부었다. ‘덴 앤 나우(Then and Now)’를 주제로 한 당시 행사에서는 외국어로 번역된 일본책 2만권을 한데 모아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목판, 금속활자 등 일본 인쇄기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회도 이색적이었다. 하지만 오치아이씨는 “그 다음해 스페인이 주빈국 행사를 치르는 것을 보고 우리행사가 너무 낭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행사의 내용물은 별개로 하더라도, 일본은 도서전 관람객들이 “와! 돈 많이 들었겠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전시대를 꾸미고 행사를 포장하는데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스페인은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간결하면서 메시지가 분명한 주빈국 행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필요 이상으로 돈을 많이 쓰긴 했어도 도서전 주빈국 행사의 소득은 바로나왔다. 잘 알려진 대로 오치아이씨도 “94년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수상”을 눈에 띄는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주빈국 행사를 통해 유럽인들이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 더 큰 성과”라고 말했다.
“주빈국 행사는 물론 책이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전통을 말해주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좋을 것”이라는 그는 “외국인들이 ‘저게 뭘까’하는호기심을 갖도록 한 뒤, 그 나라의 문화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적은 인원으로 눈길을 끌기에 사물놀이 공연만한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일본사람이나 한국인이 보기에 한국, 일본 두 나라는 전혀 다르지만 외국인들은 아직도 ‘그게 그거 아니냐’고 느낍니다. 내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일본이나 중국과 무엇이 다른지, 한국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또 어떤 저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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