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0월8일 남민전 중앙위원 신향식이 교수대에서 삶을 마쳤다. 향년 48. 전남 고흥 출신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향식의 생애는 민족 분단이 야기한 두 개의 사건 위에 얹혀 있었다. 첫째가 1968년의 통혁당 사건이었고, 둘째가 1979년의 남민전 사건이었다.공안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통혁당은 남파 간첩 김종태가 전(前)남로당원과 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들을 포섭해 남한의 요인 암살과 정부 전복을 꾀하려 조직한, 북한 조선노동당의 재남(在南) 지하당이었다. 이 사건 관련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사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0년간 복역한 뒤 1988년 8·15 특사로 가석방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일 것이다. 신향식은 이 사건에 연루돼 3년6개월간 복역한 뒤 1972년 비전향 상태에서 출소했다. 세 해 뒤인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출소자들을 다시 장기 구금하는 길을 열어놓자, 신향식은 체포를 피해 지하로 잠적한 뒤 이듬해 2월 이재문 등과 함께 남민전을 조직했다.
신향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남민전은, 역시 공안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으로 베트콩식 활동방식을 도입해 국가전복투쟁을 전개했다. 지난 1994년 작고한 시인 김남주는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수감 9년3개월만인 1989년 형 집행정지로 출감한 바 있고, 사건이 터질 당시 유럽에 있던 조직원 홍세화는 귀국하지 못하고 그 뒤 20년 간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통혁당이나 남민전의 조직원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는지는 그들 자신만이 알겠지만, 이들이 통일된 자주적 조국을 꿈꾼 어기찬 민족주의자들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국 현대사는 민족주의 담론이 넘쳐 흐르는 가운데 민족주의자들이 박해 받는 기묘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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