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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30> 李大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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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30> 李大釗

입력
200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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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0월6일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 리다자오(李大釗)가 허베이성(河北省)에서 태어났다. 38세 때인 1927년 군벌 두목 장쭤린(張作霖) 군대에게 붙잡혀 총살당한 리다자오는 열 살 위의 천두슈(陳獨秀)와 함께 중국공산당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 네 살 아래의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둘도 없는 스승이자 절친한 선배였다. 리다자오는 1918년부터 1920년대 초까지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역사학 교수 겸 도서관 주임으로 재직했는데, 그의 첫 번째 조교가 된 청년이 마오쩌둥이었다.마오쩌둥은 리다자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현실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다시 말해, 중국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존 공식과 달리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 주도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마오쩌둥에게 건넨 사람이 리다자오였다. 리다자오가 요절하지 않고 반제반봉건 혁명전쟁 뒤까지 살아 남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목격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됐을지 궁금하다. 두 사람 다 지식인의 면모와 실천적 혁명가·전략가의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마오쩌둥이 주로 독학을 통해 지식인이 된 반면, 리다자오는 제도교육의 경로를 따라 지식인이 되었다. 톈진(天津)의 베이양(北洋)법정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한 리다자오는 귀국해 베이징의 진보적 신문 신종보(晨鐘報)의 편집자로 일하다 베이징대학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20대 초인 1911년 신해혁명 때부터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쑨원(孫文)의 중국동맹회, 중국공산당, (국공합작 시기의) 국민당 등을 둥지로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 전사(戰士)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의 비극성도 어찌 보면 전사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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