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의 비난의 소리는 청와대에도 들어갔다. 당시 경제 수석인 김재익 박사는 우리가 이 때문에 흔들릴 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는 “우리는 박사님을 신뢰하고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쳐 주기를 바란다”며 안심시켜 주었다.추궁보다는 내 입장을 이해하고 격려해 준 셈이다. 제5공화국 초기 경제 정책을 두루 조율했던 김 수석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때 유명을 달리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행정 전산화 프로젝트를 맡을 당시 오 명 체신부 차관과 나눈 대화를 인용해 김 수석에게입장을 설명했다. 나는 오 차관에게 “매우 용감한 일을 할 작정이다.
그런 만큼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략과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비난은 일을 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다. 다른 욕은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는 김 수석에게 “투서는 겁나지 않는다. 개인 비리에 관한 비난은 사실과 다를 테니 그 점만은 믿어도 된다”고 강조했다.
행정 전산화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음으로 양으로 나를 믿고 도와준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예산의 ‘선(先) 투자 후(後) 정산’ 방식을 도입하는 일과 정부 관료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홍성원 청와대 경제 비서관 등은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김 수석 또한 우리 힘으로 정보화 사회를 앞당기겠다는 나의 약속을 믿고 온갖 구설이 떠돌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 주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행정 전산화 사업은 나와 이들의 공동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행정 전산화 작업을 하면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주 전산기 분야를 수출 산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한 일이다.
당초 내 전략은 신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개발하는 일은 미국쪽에 맡기고,구체적인 설계와 생산은 우리가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또 미국 시장은 미국 벤처 기업이,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다른 시장은 우리가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특히 정부가 개발한 행정전산 등 응용 소프트웨어는 동남아 국가들에게 무료로 끼워 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기술을 맡은 전자통신연구소가 독자 개발을 고집, 결국 이 사업은 수출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국내용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한 가지 원칙은 끝까지 밀고 나갔다. 삼보컴퓨터와의 이해가 얽혀 들 때면 항상 공적인 차원에서 일을 처리했다. 삼보보다 행정 전산화 사업의 이해를 우선했다는 뜻이다.
주 전산기 생산 업체로 5개 회사를 택할 때는 삼보는 넣지도 않았다. 당시 삼보는 유일한 국산 컴퓨터 메이커였는데도 말이다.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11개를 뽑을 때도 업계 자율적으로 선정토록 했는데, 그 리스트에 삼보가 들어 있어 빼라고 반려했다.
이 같은 처신에 대해 삼보 내부에서는 나 때문에 성장의 중요한 기회를 잃게 됐다는 불평이 쏟아졌다.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삼보컴퓨터는 내 손으로 직접 세웠고, 최대주주 였지만 한국데이터통신㈜을 맡는 동안 삼보에서는 한푼도 갖다 쓰지 않았다. 88년 삼보에 복귀하기까지 이회사 돈으로는 골프 한 번 친 일이 없고, 술 한 잔 마신 적이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