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없는 얼치기다. 나이 스물이 다 되서도 읽을 줄도, 쓸 줄도, 셈할 줄도 모른다. 꼬락서니는 더 가관이다. 부스럼을 앓아 동그랗게 벗겨진 더벅머리에 눈은 게슴츠레하고 몸은 굼뜬데 ‘영구 없다’며 혀 짧은 소리를 내다, 동네 아이들에게 붙잡혀 두들겨 맡기 일쑤다. 이 한심한 중생이 그래도 자기 마누라 귀한 줄은 알아 노상 ‘색시야’를 입에 달고 다닌다.엄연히 자기 이름이 있으면서도 일평생 ‘바보’라 불린 사내, 여주 감나무골 최 주사 집 외아들 영구(장욱제)에 대한 약술(略述)이다. 코미디언 심형래가 앞뒤 다 잘라내고 오로지 그의 우스운 짓거리만 흉내낸 까닭에 ‘영구’라는 이름이 바보의 대체어로 쓰이고 있는 요즘, 최씨의 구구한 인생유전은 가뭇할 따름이다.
그러나 똑똑하다는 누구누구도 단 한번만 경쟁에서 밀리면 곧바로 삶에서 추방되고 마는 살벌한 이 시절, 외려 우리에게는 도무지 남을 미워할 줄 몰라 ‘바보’였고, 돈 맛도 세상물정도 알지도 못해 ‘천치’였던, 순수한 한 사내의 사연이 문득 그립다.
“기웅아, 기웅아. 나 간다. 니 엄마한테.” 영구는 지난해 겨울을 끝내 넘기지 못했다. 부인 박분이씨가 세상을 뜬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늘 그랬듯이 주어와 술어가 뒤죽박죽이 된 말 한마디와 흑백 사진 한 장을 남겨놓고.
아들 기웅(송승환)이 아버지의 손을 폈을 때 거기엔 ‘1962년 행복 사진관’이란 흰 글씨가 선명한 그 사진이 있었다. 세탁소에서 빌려온 양복을 어색하게 차려 입은 아버지와, 고운 한복을 입은 어머니, 까까머리 중학생인 자신을 모습을 보며 아들 기웅(송승환)의 뺨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마치 그날처럼 말이다. “찾았다. 찾았다. 우리 샛씨. 샛씨야, 부산에서 구두닦이 하면서도 찾았고 대전에서 포장마차 하면서도 찾았다…” 꿈에도 그리던 색시 ‘분이’(태현실)와 재회하던 날, 영구는 그 말을 수 없이 되풀이했다. 두 뺨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분이가 바보 신랑을 찾으러 올 턱이 없다며, 일찌감치 재가 했을터라고 너나없이 장담했지만 영구는 일분 일초도 포기하지 않았다. 분이와의 재회는 그에게 신념이었고, 종교였고,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분이가 잠시 가출했을 때도 “온다, 온다. 꼭 온다. 우리 샛씨 꼭 온다”며 그녀를 기다리던 영구였다.
바보 영구의 색시는 술집 작부였던 사연 많은 여자. 밥술깨나 먹고 사는 넉넉한 살림 덕에 걱정이라고는 오로지 덜 떨어진 아들 영구 뿐이던 아버지 최 주사가 동네 불량배인 달중의 꾀임에 넘어가 분이의 과거를 모른 채며느리로 맞아들이며 비극은 잉태한다.
최 주사의 후처인 윤씨(박주아)는 집안 재산을 가로챌 심보로 며느리를 혹독하게 구박한다. 거기에 분이를 겁탈하려는 달중이까지 가세해 선악의 대결은 명징해진다.
공식처럼 ‘현모양처’ 분이는 꿋꿋하다. 온달을 고구려 대장군으로 출세시킨 평강공주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바보 서방을 살뜰히 보살피고 마침내 임신까지 해 아들 기웅(송승환)을 낳는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분이 몫이다.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의 구박과 놀림 속에서 살아가던 영구에게 분이는 구원이었다.
그러나 영구의 생에서 불행은 피해갈 수 없는 무엇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영구는 자신의 불행 앞에서 무력했다. 아버지 최 주사는 집에 독립군을 숨겼다는 죄목으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했고, 분이는 과거가 들통나 시어머니 윤씨에 의해 쫓겨난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희망은 희박해져 간다.
피란지 부산에서 스칠 듯, 말 듯 만나지 못하는 분이와 영구. 이들의 순정한 사랑은 분이가 국밥집을 운영하며 큰 돈을 모아 사회 환원했다는 기사가 실리며 재회한다. 그 다음은 뻔하다. ‘그들은 다시 가정을 꾸렸고 분이의 헌신 속에서 영구는 착한 아이처럼 그렇게 살았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영구의 사연은 3류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렇고 그런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는 카피처럼 신파다. 하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식민지 백성으로 눈 감고 코 막고 ‘바보’로 살 것을 요구당했던 일제치하의 기구한 운명을 지나 6.25와 독재로 이어지는 험한 세월 속에서 꾹꾹 억눌렸고, 분단과 이산가족문제로 괴로워 했던 사람들의 정서는 ‘바보’ 영구를 통해 폭발했다.
모자라고 배운 것 없는 영구와 격정의 세월 속에서 상처 입은 분이가 서로를 보듬어 가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웃고 또 울었다. 그러기에 ‘바보’ 영구는 다름아닌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김대성기자lovelily@hk.co.kr
■바보 캐릭터 인기행진
드라마 ‘여로’는 방영 당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영구(장욱제)의 바보 연기를 흉내를 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꼬마들이 뒤뚱뒤뚱 걷거나 ‘아버지야, 밥 먹었니’ 같은 대사를 따라 하는 세태를 꼬집으며 드라마의 폐단을 지적했다.
그러나 전쟁과 독재로 억눌려 있던 대중들은 ‘영구’라는 바보의 모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영구 캐릭터의 인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같은 시기 바보 스타의 원조 배삼룡이 ‘배실이 춤’을 선보여 최고 인기를 끌었다는 것만 봐도 시대가 ‘바보’를 필요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신 군부독재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80년대 초반도 한국사회는 새로운 바보를 만들어 냈다. ‘수지 큐’ 반주에 맞춰 우스꽝스러운 오리춤을 통해 코미디 황제로 등극한 이주일이 바로 그 장본인. 세태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을 선 보일 수 없었던 정치상황에서 단순한몸 동작과 과장된 바보스러움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예가 바로 그였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심형래가 한국적 바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구의 몸짓과 말투를 따라 하면서 바보 스타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로’의 영구가 순진성에 기반을 두었다면, 심형래의 영구는 비록 바보지만 때론 엉뚱하고 영악하게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을 골탕 먹였다.
그의 인기는 89년 심형래가 영구로 등장한 영화 ‘영구와 땡칠이’가 전국200만 관객동원에 성공하며 그 해 최고 흥행을 기록할 만큼 식을 줄 몰랐다.
그 후로도 ‘바보들의 행진’은 계속됐다. 90년대 초반에는 영구를 패러디한 맹구로 이창훈이 큰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에는 그 맹구를 다시 벤치마킹 한 개그맨 심현섭도 사랑을 받았다.최근에는 코미디언 정준하가 MBC ‘코미디하우스’의 ‘노브레인 서바이버’ 코너를 통해 배삼룡_이주일_심형래_이창훈으로 이어지는 바보 코미디 연기의 계보를 이어갔다.
/김대성기자
■그때 한국일보에는-드라마 '여로'
1972년 4월 3일, KBS 드라마 ‘여로’(극본ㆍ연출 이남섭)가 방영되면서 오후 7시30분이 되면 거리는 한산해 졌다. TV 수상기가 많지 않았던 시절, 동네사람들은 ‘여로’를 보기 위해 부잣집으로 모여들었다.
드라마로 남녀주인공 장욱제와 태현실은 최고 배우로 떠올랐고, 폭발적인 TV 수요에 가전 회사들도 덩달아 덕을 보았다. 그 해 말 211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화제가 되었던 ‘여로’는 대한민국 50년 ‘50대 히트상품’과 PD들이 뽑은 ‘20세기 베스트 드라마’로 뽑혔다.
한국일보는 73년 1월 9일자에 “지난해 하반기 ‘여로’의 선풍이 몰아친것이 사실인 듯 ‘여로다방’이 등장했고, ‘여로빵’이 나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사로 잡았고, 서울 시내에는 여러 곳에 ‘감골식당’이 생기는 이변을 낳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여로’는 요즘 드라마의 문제로 흔히 지적되는 ‘연장방영’‘장애인 비하’‘급작스러운 해피엔딩’ 등으로 언론으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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