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로 상징되는 노무현 정부의 개혁정책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 추석 민심의 폭격을 맞은 것이다. 계층, 연령,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인 민심은 경제가 어려운데 노무현 정부가 개혁을 한다며 분란만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그 결과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한나라당보다 훨씬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언론은 노무현 정부가 민심을 읽고 경제살리기에 나서라고 목청을 올리고 있고 열린우리당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두말 할 나위 없이 민주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뜻, 즉 민심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항상 대중의 뜻만 따라가는 대중추수주의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권에 관한 한 특히 그러하다. 인권의 경우 중요한 것은 민심이 아니라 원칙이다. 이 점에서 개별 사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노무현 정부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개혁법안,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이 인권과 관련된 개혁법안들은 경제를 이유로 미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는 민심의 신음소리와 분노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의 와해를 넘어서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가 최근 경고한 바 있듯이 민주주의가 다수 국민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의 지지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노무현 정부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개혁을 추진하되 불필요한 분란을 최소화하도록 대통령의 전투적 리더십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국보법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보법은 폐지해야 하지만 이 문제를 꼭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선전포고를 하듯이 추진했어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그리고 보수원로 등을 만나 “이제 국보법은 없어져야 하며, 우려하는 부분은 형법 등으로 보완할 것이니 협력해 달라”는 식으로 협조를 구했다면 최소한 지금과 같은 수준의 분란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사실 국보법에 대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입장이 내용적으로는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경제 문제도 그러하다. 노 대통령은 경제가 어렵다는 여론에 대해 “여러서민들의 삶이 어려워 대통령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식으로 부양책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어려워도 참아 달라”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들의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률과 같이 단순한 거시경제 지표를 내세워경제는 괜찮은데 수구언론이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응수나 하고 있었으니 이를 접하는 서민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경제 정책도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언론이 주장하듯이 무조건 경제 살리기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
좌파 시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은 충분히 친시장적이며 큰 틀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추종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경제위기론에 대해 성장률이 4~5%대인데 무슨 위기냐고 반박하면서 보지 못한 것은 총량적 성장률 뒤에 숨겨진 부문별 불평등이다.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후 빈부격차는 이를 조사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됐고 이 같은 추세는 현 정부 들어서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사실 추석 민심의 핵심은 이같이 양극화된 다수 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것이다.
그리고 재계와 언론이 주장하는 식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살리기로 나아가는 한, 경제성장률은 높아질지는 모르지만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줄 궁극적인 결과는 뻔하다. 그것은 민주주의 지지기반의 와해, 그리고 박정희와 파시즘에 대한 향수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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