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비가 내리고 나니 가을이 문득 깊어졌습니다. 청명하게 시린 하늘 아래 아름다운 주말을 보내셨는지요. 추석에 만나보았던 고향 집 모습이 아직 눈 앞에 어른거려 더욱 특별한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이제 하나 둘, 잎이 물들기 시작하고 벌써 이 산 저 산의 단풍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도 많이 들립니다. 이번 가을에 수많은 나무들이 앞다퉈 물드는 현란한 단풍구경도 좋지만,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 순례를 한 번 해 보십시오. 아름다운 은행나무 길을 거니는 것도 멋있지만 그보다는 수백년혹은 천년 이상을 살아온 은행나무 노거수 순례를 말입니다.
은행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 143건 중에 은행나무가 21건이나 차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의태자의 전설을 담은 용문사의 은행나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라고 하는 문막의 은행나무, 혹시 그 길이 너무 멀다면 서울 한복판 성균관 마당에 있는 유주가 길게 발달한 은행나무도 좋습니다.
그 숱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몇 아름되는 웅대한 은행나무의 노란그늘아래 서서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느라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아웅다웅 마음 졸이고 다투며 지내온 그 시간들이 참으로 하찮고 부끄러워집니다. 좀 더 멀리, 좀 더 깊게 삶을 바라보는 마음의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어디 은행나무뿐 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천연기념물에는 새벽 안개 속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갈빛이 더없이 깊이 있는 느티나무도 있고, 계절의 흐름을 비껴갈 것 같은 늘 푸른 소나무와 위로만 자란다는 고정 관념을 버리도록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모습의 소나무들도 있습니다. 또 나무 하나하나마다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은 이 나무들이 모두 예사롭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오래 전 천연기념물 책을 하나 만들며 틈만 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모든 나무와 숲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나무를 일일이 만났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나무들 앞에 서면 나무의 살아있음과 신령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더러 커다란 나무 주변에 쌓여 있는 쓰레기와 좁은 생육 공간 때문에 거목의 신령함이 상처받은 듯해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전국을 찾아 다니며 만났던 나무들이 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내가 조금이라도 담아지낼 수 있다면 아마 저는 아주 지혜롭고, 너그럽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천연기념물들이 단지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문화유산인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왕 길을 떠나시려거든 미리 만나고자 하는 그 아름다운 나무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보고 가십시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모두 337건이나 되고, 그 중에서 식물만 해도 220건이나 지정돼 있습니다. 정보를 찾는 길은 인터넷도 있고, 책도 있고 방법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여러 해 전에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책이 인기를 얻으며, 아는 만큼 보고 느끼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듯이 그런 정보들이 여러분이 천연기념물을제대로 만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문화유산과 함께 하는, 오래된 나무의 지혜를 가슴 깊이 담아오는 의미있는 가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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