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고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세계의 유수 기업들을 찾아 나섰다.최신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을 도입, 민간 기업에 공짜로 전수해 주겠다고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1984년 봄으로 기억한다. 나는 미국보다 영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영국에서는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모여 개발 방법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응용개발 기술 수준은 미국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나는 영국의 컨소시엄에서 노하우를 도입키로 결정했다. 세계적 명문인 영국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유능한 컨설턴트들이 대거 한국데이타통신㈜에 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소프트웨어 개발 툴(Toolㆍ도구)은 미국 요돈(Yourdon)사 것을 채택키로 했다. 당시 요돈은 새로운 개발방법을 만들어 많은 기업에 보급하기 시작했고, 훌륭한 교육시스템을 갖췄다. 요돈의 전문가들은 행정 전산화 프로젝트에 참여키로 한 우리 나라 기업의 엔지니어들에게 사용법을 강의했다. 한국전산원이 발족된 후인 1986년에는 당시 원장인 김성진 박사가 개발방법으로 ‘메소드 1’(Method 1)를 추천한 일도 있다.
행정 전산화 작업을 수행하는 데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중하나가 데이터 입력 문제였다. 당시 입력 방법은 지금과 달랐다. 지금은 PC에서 키보드만 치면 되지만 그 때는 자료를 모두 펀치카드를 통해 입력했다. 이 카드를 모아 카드 리더를 통해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방법을 썼다. 당연히 키펀치만 맡아 펀치카드를 만들어 주는 전문 용역 기관들이 많았다.
한국데이타통신㈜에서 모든 국민의 주민등록 사항을 컴퓨터에 입력, 데이터 베이스를 만든다고 하니까 이런 저런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벌인다고 했다. 왜냐하면 전 국민의 주민 자료를 키펀치 하려면 이 땅의 키펀치 회사 전부가 매달려 수 십년 간 작업해도 끝내지 못할 만큼 분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면사무소나 동회 직원들이 직접 PC를 통해 입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PC는 행정 전산화 프로젝트에 따라 모든 면사무소에도 보급될 예정이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면 서기나 동 직원이 컴퓨터를 구경한 적도 없고, 타자를 쳐본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반대했다.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인들의 우려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자료를 입력하는 일을 마치 컴퓨터를 설계하고 직접 만드는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됐다. 실제로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다룰 수 있는데도 말이다. 기술이 발전하다 보면 복잡하기짝이 없는 자동차와 컴퓨터의 내부 구조를 모르고도 얼마든지 편한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들이 외면한 탓도 있다.
프로젝트에 따라 서울의 동회는 물론 시골 면사무소까지 PC를 보급하는 데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나는 우선 행정 전산화 사업이 삼보PC를 팔아먹기 위한 수단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때 삼보는 우리나라 PC 시장을 거의 휩쓸었다. 기술과 가격면에서 그만큼 월등했다. 그렇지만 나는 PC를 만들겠다고 나선 10개가 넘는 업체들에게 똑같은 수량만큼 발주토록 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