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레이 황 지음/김한식등 옮김
새물결/1만7,500원
나침반, 화약, 종이를 발명한 ‘천하의 중심’ 중국이 근세에 왜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중국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역사학자 레이 황(1918~2000)의 설명은 명쾌하다. “중국은 2,000년 동안 도덕이 법률과 제도를 대신해왔고, 명대에 와서는 극에 달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는 이러한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쓴 책이다. 1587년은 명나라 14대 황제 신종(만력제ㆍ1572~1620)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이 되는 해. 역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일이 없었던 태평스러운 시기였지만 역사학자의 눈에는 좀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책 집필의 방향과 대상만을 보면 사실(史實)을 나열하고 분석한 고리타분한 역사서이거니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만력제를 비롯, 당시 2인자인 신시행, 만력제 스승인 장거정, 모범적인 관료였던 해서, 명장 척계광, 철학자 이탁오 등 16세기 후반 중국 역사무대의 주인공들의 인물전기 형식을 빌린 기발한 서술방식과 내용은 독자의 눈길을 금세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실현하려고 했던 해서를 통해서는 농촌의 사회구조, 화폐제도의 문제, 관료들의 고지식한 모습 등을 파헤치고, ‘척계광’에서는 명나라 군조직 편제나, 문무의차별에 따르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이다.
저자는 1587년 3월 2일에 일어난 해프닝에 주목한다. 궁성에서 대전(大典ㆍ국가의 큰 의례)을 실시하니 곧장 집결하라는 통지를 받고 2,000여명에 이르는 문무백관이 부랴부랴 자금성에 모였으나, 조회를 소집한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말을 확인하라는 황제의 엄명이 있었으나 결국 유야무야된 이 사건을 실마리로 저자는 고이고, 막힌 궁중문화와 관료제도의 맹점과 허점을 하나하나 들춰낸다. 형식에 치우친 번잡한 의례, 당파를 나눠 벌이는 탄핵과 반격, 사문난적(斯文亂賊ㆍ유교 사상에 어긋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논쟁 등은 결국 나라를 좀먹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명조의 엄격한 중앙집권도 경제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오히려 후진적인 경제의 보존과 균형을 유지해 왕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고, 그 결과 상업자본과 공업의 발달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저자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저자의 결론은 중국의 역대왕조가 내세운 윤리ㆍ도덕은 인간사회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아 사회 각 방면에서 폐해가 발생하고 모순이 격화했다는 것. 중국의 원조 성리학자들보다 형식과 의례를 중시한 ‘근본주의자’들이 나라를 이끌었던 조선왕조의 비극적인결말과 어찌 그렇게 닮았을까.
1981년 미국 예일대 출판부에서 처음으로 나온 이 책은 현재 미국 주요 대학 역사학과 교재로 사용되고 있고, 중국어판만 100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중국의 근ㆍ현세사를 파악하기 위한 역사의 단면을 찾아내고, 나아가 도도한 세계사의 물줄기에 접목해 가는 역사학자의 날카로운 혜안도 놀랍지만, 일반인들을 흥미롭게 그 강물로 끌어들이는 수완은 역사 대중화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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