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다. 햇살은 여름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으나 공기는 차갑다. 이 청명함 속에 머리를 맡기고 길을 걷는다.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누군가에게 기도하고 싶어진다. 자연이 연출하는 빛의 농담과 색깔이 선명하고 이때만큼은 인간이 사는 집의 지붕들도 아름답다. 시간의 이 어김없는 순환은 도대체 누구의 시나리오일까. 천천히 길을 걸으며 짧은 몽상에 젖어본다. 사무실에 들어와 신문을 펼쳐 들면서부터 그러나 불현듯 현실감을 되찾는다.자살률이 급증해서 사망원인 중 5위란다. 특히 20, 30대에서는 1위란다. 충격이다. 왜일까? 무엇이 젊은 그들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일까? 인간에게 모르모트와 같은 본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한 전직 독재자의 아들은 음주운전 땜에 또 신문 한 귀퉁이를 장식했다. 그의 이름 뒤로 감자뿌리처럼 줄줄이 고개를 드는 비자금, 광주, 학살, 정권찬탈… 악취에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자이툰 부대다.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또 다른 젊은 그들.
50일간의 이동작전이 무사히 끝났단다. 그들 앞엔 또 얼마나 많은 명예롭지 못한 ‘작전’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기록될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부시가 유엔에서 냉소적인 대접을 받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한나라당은 행정수도이전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다는 기사도 보이고, 공주로 일생을 살아온 그 당의 대표는 보안법 때문에 비틀거린다. 이제는 차라리 안쓰럽다. 세상의 변화를 기득권의 상실로만 받아들이는 꼴통보수들의 전쟁에 자신이 상징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까?
36페이지나 되는 신문을 가득채운 세상의 소식들을 읽다가 오히려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어지럽다. 자연의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이 질서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다른가. 어린 딸은 하루에 두번씩 전화를 걸어온다. 제 엄마의 핸드폰 단축키 쓰는 걸 혼자 터득했다. “아빠. 나야. 나.” 서툰 말로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전해준다. 문득 두려워진다. 이 아이에게 펼쳐질 세상이. 그리고 이 세상 외에 우리에겐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이.
김경형/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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