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데이타통신㈜ 출범과 동시에 행정전산 전담팀을 만들었다. 행정전산을 발판 삼아 우리나라 정보통신을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만드는 게 꿈이었다. 나는 데이타통신 사장직을 수락할 때 행정전산 업무를 모두 우리에게 맡길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이를 위해 편하고 성공 가능성이 높은 방법 대신 ‘험로’를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 순간의 성취감보다는 어렵더라도 길게 봐서 우리나라에 유익한 방법을 찾기로 했다.
행정 전산망이란 읍ㆍ면ㆍ동 단위까지 컴퓨터를 설치, 전국을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정부 행정기관의 중추 신경 조직이다. 전산망이 완성되면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이룩할 수 있고, 전국 어디에나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화 사회의 기틀을 확고히 다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기회에 행정 전산에 쓰일 중형 및 대형 컴퓨터도 모두 국산으로 대체키로 했으며 그 컴퓨터는 가장 새로운 기술을 채택키로 했다.
또 각 부처의 전산화 사업을 ‘선(先) 투자 후(後) 정산’ 방식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엔 예산을 따내 일을 처리하려면 정보화 관련 프로젝트 한 개를 완성하는 데도 보통 5년이 걸렸다. 이런 까닭에 급한 일이면 서둘러 착수해 놓고 그 다음에 비용을 청구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정부의 돈을 쓰려면 먼저 예산을 책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용역을 맡기는 게 관례였다. 당연히 공무원들은 예산 당국의 규정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보화 관련 사업은 시간이 성패를 좌우하는 만큼 내 제안이 수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버티었다. 이 때문에 오 명 체신부차관과 홍성원 청와대 경제 비서관이 중재를 맡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특히 홍 비서관은 내 제안에 크게 반발한 경제기획원을 달래는 데 무진 애를 썼다.곡절 끝에 정부는 결국 내 편을 들었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두 개의 기관을 새로 만들었다. 하나는 한국통신 산하에 설립된 통신진흥㈜이다. 선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 회사에서 돈을 빌려 행정 전산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나중에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갚기로 했다.
또 하나는 한국전산원이다. 우리 회사가 일방적으로 행정전산 업무를 수행하고 난 다음 청구서를 내면 타당성을 엄정하게 심사하는 게 이 회사의 임무였다. 일종의 감리 기관인 셈이다. 이 일은 당연히 감사원이 맡아야 하지만 고도로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행정전산에 관한한 감사원을 대행할 기관이 필요했다. 지금은 전산원이 정보통신부의 여러 가지 사업을 대행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오 차관과 홍 비서관은 정보통신 기술을 한단계 높이기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나는 선 투자 후 정산을 위한 체제가 갖춰짐에 따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공무원들의 반발은 쉽게 누그러 들지 않았다. 예산 당국이 이 제도를 받아들이기 까지는 숱한 고비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1982년 3월 한국데이타통신㈜이 설립되면서 바로 시행키로 했던 행정 전산화 사업은 1985년에야 돛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행정 전산 프로젝트의 일괄 계약에 대한 반대하는 부처와 업체들이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자기들이 직접할 일을 데이타통신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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