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들락거리던 북파공작원이 강원도 탄광을 주름 잡은 건달로, 독일의 남자보조간호사를 거쳐 현재는 아르헨티나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면. 그동안의 파란과 곡절을 짐작할 만하다. 사람이 한평생 여러 번 새롭게 산다고는 하지만, 그런 삶은 신앙 간증을 위한 과정처럼 극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 주인공은 재미동포 김태원(70ㆍ사진) 목사. 그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삶의 편린을 모은 회고록 ‘북파공작원에서 선교사로’(스포라 발행)를 냈다. 공군예비역 전우회 인터넷 모임인 로카피스(www.kafi.net)에 띄운 군시절 이야기와 20여년간 선교사로 세계 각지를 돌며 간증한 내용들을 묶은 것이다.
30대 초반까지 그는 그야말로 사고뭉치였다. 고교(태백공고)시절 문제아로 찍혀 특수부대에 입대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 속에서 ‘깡다구’ 하나로 버틴 독종이었다.그는 서울 오류동 공군 특무전대 정보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배속된 오호리(강원 속초)파견대에서 처음 북한 땅을 밟았다. 10명이 한 조를 이뤄 휴전선을 넘었으나 북한 매복조에 걸려 인솔자가 그 자리에서 사살됐고, 그도 생포 직전 겨우 빠져 나왔다.
그 후로 툭하면 총질하고 주먹질을 하는, 성질 더러운 ‘깡패중대 김 상사’로 통했고, 한편으로는 의리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특수부대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 목사는 당시 전과자를 훈련시켜 백령도를 통해 평양으로 침투시켰던 일,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실미도 684부대 교육대장 김순웅상사(안성기 분)와 함께 낙하산 강하훈련을 받았던 일도 털어놓았다.
5년 6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친 그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 취직했다.그의 업무는 광부들을 위해 세운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 판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 돈으로, 술로, 공갈협박과 주먹으로 하는 일이라 그에게는 적역이었다. 당시 수간호사이던 부인은 그의 방탕한 생활에 실망해 독일로 떠났고, 2년후 그도 남자 보조간호사로 따라갔다. 제2의 인생을 찾은 것이다.
5년여 동안 돈을 모은 그는 미국에 정착했고, 부인의 권유로 목사가 됐다. 그 후로는 유럽 파송 선교사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서 개척교회를 맡으며 선교의 불꽃을 살랐다. 김 목사는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거주하며 남미 목사들을 모아 교육하는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LA에서 열리는 교회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미국에 머물고 있는 김 목사는 전화 통화에서 “지나간 삶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살인적인 훈련과 공포감을 이겨내야 했고, 수많은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한 군데도 다치지 않은 게 저 자신도 믿어지지 않아요.”
지난해 영화 ‘실미도’ 개봉 때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10월9일 오후7시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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