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부르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왜 국보법 폐지하라고 까불고 다니는 거냐. 노무현은 물러가라.”우리 시대의 대표적 원로 만담가 김동길씨가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우익 단체 집회에서 하셨다는 말씀이다.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기는 하나, 김동길씨 심정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1980년대에 전두환씨를 대통령이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고, 언제쯤 저 얼굴 안 보고 사나 하며 이를 갈았기 때문이다. 김동길씨 심정이나 내 심정이나 일종의 ‘부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김동길씨의 부아가 과거의 내 부아보다 이치에 더 어긋난다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노 대통령은 전두환씨처럼 총칼 휘두르며 저 스스로 임명하고 임명된 조폭 우두머리도 아니고, 북의 김정일씨처럼 아버지 치세 때 이미 세자로 책봉된 봉건 제후도 아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은 국민의 의지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공화국 대통령이다.물론, 그래도 그를 대통령이라 부르기 싫다면 그건 김동길씨의 개인적 취향이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래도 ‘까불지 마라’거나 ‘물러가라’는 말은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다. 비록 한국 민주주의의 빛나는 전진이 그런 말을 맘대로 할 자유를 김동길씨에게도 베풀기는 했지만 말이다.
김동길씨가 노무현 물러가라고 하는 것이 꼭 이념적 이유, 구체적으로 이정부의 ‘반미적 성격’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김동길씨가 바로 뒤에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파병을 했다, 반미 정권이 반미 해야지 파병은 왜 하느냐, 말은 반미지만 반미 하는 것도 없다”는 말로 청중을 웃겼다니 말이다.그렇다. 어떤 기준으로도 노 정권을 반미 정권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김동길씨 같은 숭미주의자들은 도대체 왜 노 정권에 그리 부아를 낼까? 그냥 노무현과 그 주변 사람들이 싫어서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이쯤 되면 노 정권으로서도 대책이 없다. 그저 싫다는데야 어쩌겠는가? 싫어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목소리 큰 몇몇 만담가들이 물러가라고 한다고 해서 자신을 뽑아준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그냥 물러난다?이게 말 안 되는 소리라는 건 김동길씨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김동길씨에게 남은 수는 그저 꾹 참고 세 해 반을 더 기다리는 것뿐이다.김동길씨는 이미 97년에도 “김대중이 대통령 됐을 때 5년을 어떻게 참나 걱정했다”고 하니, 안 됐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쩌겠는가, 기다리는 수밖에. 다음 대선에서라고 김동길씨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김동길씨는 그 전날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에서도 “요즘 청와대는 북의 인민공화국 출장소와 비슷하다”며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심정으로 나왔다”고 말했단다. 나는 이런 허무맹랑한 만담까지를 허용하는 조국의 자유민주주의에 감사하며, 김동길씨에게 천기를 하나 누설해드리겠다. 대한민국 우익의 담론 수준이 계속 이 정도라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 다음 선거에서도 가망이 없으리라는 사실 말이다.
지난 주말의 우익 집회들에서는 김동길씨 발언을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보이게 할 정도로 흉흉한 말들이 많이 나온 모양이다. 기사를 읽으며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표현의 자유를 신봉하는 민주시민으로서 부아를 눅였다.민주주의 사회에서 황당한 말 자체가 자동적으로 범죄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중 앞에서의 그런 황당한 선동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야기해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칠 때,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별 수 없이 범죄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의 ‘행동하는 우익 만담가들’께서 유념하셨으면 한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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