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배를 조종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놀라우리만큼 매력적이어서 플라톤 이래로 널리 사람들의 지적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배의 은유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헤쳐가며 생존과 번영을 향해 전력투구하는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묘사하는 데 그만이다. 풍랑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에서 민족의 운명을 가늠하는 도전을 극복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오버랩’되지 않는가.한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이 배를 조종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세심한 통찰일 터이다.배를 조종하는 것은 종합예술이다. 날씨, 바람, 배의 상태, 선원들의 건강상태 등 모든 것을 감안하고 또 항로까지 결정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배를 조종하는 것은 자동차 운전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기야 자동차가 별건가. 양철판에 엔진을 단 것이 자동차일 터이다.요즈음 구멍가게 주인도 이런 생각을 할만하다. 백화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손님들을 보면서 물건 파는 것은 피차일반인데, 자신이라고 해서 백화점 운영을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마찬가지로 식구 셋이 탄 자동차도 운전해봤는데, 수많은 승객이 탄 배라고 해서 겁낼 필요가 있을까. 땅을 바다로, 작은 자동차를 큰배로 바꾸어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운전수 역량정도에 불과한 사람이 배의 조종간을 잡게 되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민주사회에서 일어나리라는 점을 이미 플라톤은 ‘이상국가론’에서 우려한 바 있다.선박에 관한 경륜과 지식이 없어도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며 배를 조종하겠다는 데, 누가 말릴 것인가.그래서 그런지 편가르기 정쟁에 골몰하고 있는 한국정치의 저급성에 대하여 자조적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정치란 ‘나누기 기술’보다 ‘뭉치기 기술’이 필요한 분야가 아닐까.
초등학생들의 운동회는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도 하고 기마전도 하지만, 정치는 초등학생들의 운동회와 질적으로 다르다.유난히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화두가 유행하고 있는 것은 운동회 ‘서포터스’로 나서야 할 사람들이 정치를 해서인가. 편가르기 정치야말로 한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운전술과 수많은 승객들을 싣고 항해하는 배의 항해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다.
배에 대한 또 하나의 은유는 단연 ‘노이라트의 배’다. 노이라트는 항해하는 배가 고장났을 때 그 배를 고치는 사람의 역할에 주목한다. 항해하고 있는 배는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있는 배와 같지않다.정치인들이야말로 망망대해에서 항해하고 있는 배가 고장났을 때 고쳐야 하는 선원들이 아닐까. 물론 배가 항구의 도크에 있다면 배를 분해하여 문제점을 파악하고 완벽하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허나 항해하고 있는 배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장이 났다고 처음부터 깡그리 뜯어고치고자 한다면, 문제의 배는 고치기도 전에 침몰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지해있는 ‘대한민국 호(號)’를 고치는 중인가, 아니면 항해하고 있는 ‘대한민국 호(號)’를 고치는 중인가. 집권층은 나라를 새로 만드는 기분으로 모든 것을 고치고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친일파 존재이전의 상황, 국가보안법이 없던 상황으로 만들자고 한다. 좋은 말이다. 그 동안 우리에겐 얼마나 모순이 많았던가. 분단과 6ㆍ25 등 많은 것들이 민족적, 국가적 모순이었다.당연히 그 많은 모순들을 고쳐야 하겠지만 우리 정치공동체가 항해하는 배라는 점이 문제다. 침몰시켜서라도 배를 고치겠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환자를 죽이면서도 병을 고치겠다는 발상과 다를 바 없다.
이제 둥근 보름달의 한가위가 다가온다. 여야는 잠시 다툼을 멈추고 ‘플라톤의 배’와 ‘노이라트의 배’가 한국정치에 함의하는 바를 새삼 곱씹어봤으면 한다.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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