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2년 9월21일 도미니크회 수도사 겸 교회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북이탈리아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1498년 피렌체에서 졸(卒).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산 것은 생애의 마지막 일곱 해뿐이지만, 그 일곱 해는 그의 이름을 전유럽에 알린 종교적 열정으로 채워졌다. 그 종교적 열정은 당대 가톨릭 교회의 주류 세력에게 매우 위험스럽게 비쳐졌고, 그래서 그는 비극적 죽음을 맞아야 했다. 사보나롤라가 한두 세대 뒤에 태어나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의 동시대인이 되었다면, 가톨릭 수도사로 남지 않고 개신교의 첫 세대 성직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39세 때인 1491년 피렌체 산마르코수도원의 원장이 된 사보나롤라는 예언자적 언행으로 교회 혁신을 설교하며 시민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두 해 뒤 프랑스 샤를8세의 이탈리아 원정이 피렌체 사람들에게 그가 예언한 '하느님의 노여움'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 도시에서 사보나롤라의 권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뒷날 칼뱅이 제네바에서 그랬듯,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정치적·종교적 우두머리가 되어 민주주의적 신정체제를 수립했다.
칼뱅처럼 사보나롤라도 금욕주의자였고, 그 금욕주의를 시민들에게 강요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사육제를 금했고, '허영의 소각'이라는 이름으로 사치품과 이교도적 상징물들을 불태웠으며, 부패한 관리들을 엄히 처벌했다. 사보나롤라의 이런 비타협적 엄숙주의는 피렌체 시민들을 그에게 적대적인 '아랍비아티'(격노한 사람들)와 그에게 호의적인 '피아뇨니'(우는 사람들)로 분열시켰다. 게다가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드르6세를 격렬히 비판함으로써 고립을 자초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가 소환에 불응하자 그를 파문했고, 아랍비아티는 이를 구실로 산마르코수도원을 습격해 사보나롤라를 체포했다. 그는 종교 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된 뒤 다시 불태워졌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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