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이 ‘만인보’에서 그를 두고 이르기를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고 했다.‘이런 사람’이란, 언론인 정치인으로 가히 한 세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좋을 남재희(70ㆍ4선의원)씨다. 당대의 주당(酒黨)을 꼽는 자리가 있다면 그를 두고 뒷줄에 서라 할 이도 없겠고 그런다고 순순히 물러설 리도 없는 그가 ‘나의 문주(文酒) 40년’이라는 부제를 달고 술과 술자리 일화들로 엮은 산문집 ‘언론ㆍ정치 풍속사’를 냈다.그라야 쓸 수 있고, 그라서 할 수 있는 짤막짤막한 책 속의 얘기 80여 편에는 술자리에서 교유한 당대의 문인과 언론인, 정ㆍ재계 인사들이 줄줄이 담겨 있는데, 우선 지난 시절 그들의 ‘취한 모습’들이 재미 있고, 거개 장면들이 우리 현세사의 주요 장면과도 닿아 있어 흥미롭다.
진보당 간사장을 지내고 한학에도 조예가 깊던 청곡(靑谷) 윤길중 씨는 주흥이 도도해지면 후배들에게 한 마디씩 교훈을 주기를 즐겼던가 보다. 그 가운데 하나로 ‘서두현령(鼠頭懸鈴)’이라는 말이 있다. “몇 백 년이 지나도록 풀지 못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묘두현령)’의 난사를 어린 쥐가 자기 목에 방울을 달고 큰 고양이에게 잡아 먹혀 그 방울이 고양이 배속에서 울리게 했다”는 것이다.
대폿집을 즐기고 고춧가루 푼 포장마차 가락국수로 속을 달랬다던 정주영씨의 술자리 일화도 있다. 80년대 초 어느 날, 양주 대폿집이라 할 만한 종로의 한 술집에서 저자 일행이 정씨와 조우한다.
정씨는 수행원도 없이 혼자 술을 마시다 흥이 돋았던지 마이크를 쥐고 ‘쨍 하고 해뜰날~’을 불러대는 것 아닌가. 합석한 자리에서 이런 저런 말끝에 남씨가 한마디 쓴 소리를 한다. “노동조합 잘 육성하십시오.” 정씨의 즉답. “노동자요? 내가 노동자요. 우리 밖에 나가 누가 쌀 가마를 더 잘 지나 시합할까요?”
남씨는 10ㆍ26 직후 공화당 정풍운동에 의기 투합한 오유방 의원과의 술병과 술잔 깨기 맹세의식,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의 양주 술 시합 등도 소개하고 있다.선비적 풍모의 언론인 천관우씨 등 언론인들과 원로 정치인들의 주도(酒道), 전직 대통령들의 술자리 일화 등도 털어놓는다. 86년 ‘국방위 회식사건’ 이야기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책 군데군데 박재동 화백의 삽화가 보태어졌다.
그는 ‘술의 사회학적 순례’라는 한 글에서 ‘출신성분’에 따른 주법의 차이나 안주 취향 등을 소개하며, 그의 ‘문주 40년’에 미시 사회학적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고은이 ‘만인보’ 그의 시편을 개작한다면 “…그는 지난 시대에 진 술빚을 책 한 권으로 다 갚았다”는 문구를 보탤 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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