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그리고 김대중 정부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자임하는 노무현 정부가 내건 중요한 표어에 ‘상식이 통하는 사회’, ‘기본이 튼튼한 사회’가 있다. 뒤집어 보면 우리 사회가 상식이 통하지 않고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일이 곳곳에 널려 있다.대표적인 것이 노동운동에서 가끔 사용하는 준법투쟁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 노조가 규정대로 정차시간을 지키고 운행하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 협박이 되고 투쟁의 수단이 되는 사회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회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법을 지키면 상을 줘야지, 노조의 준법투쟁에 대해 정부가 처벌을 하겠다고 나서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쨌든 최근 일련의 사건은 우리 사회가 상식이 통하지 않고 왜곡이 극치에 달한 사회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지난 17일 전국 사립학교 중고등학교 교장들의 집회가 그러하다.현재 열린우리당은 사립학교에 만연한 족벌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이사장이 가지고 있는 교원임면권을 교장이 갖도록 해 1992년 사립학교법 개악 이전으로 환원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데 1,400여 명의 교장이 교원임면권을 줘도 받지 않을 것이며 열린우리당이 사학법 개정을 강행할 경우 수업 거부 등 특단의 대책을 취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아니, 교장들이 임면권을 달라고 시위를 했다면 모를까, 자신들에게 권한을 주지 말라고 시위를 하고 나섰으니 이게 어찌 정상적인 사회일 수 있는가? 아마 세계사에 희귀사례로 길이길이 남을 이번 집회야말로 역설적으로 사립학교들이 얼마나 족벌체제에 지배되고 있고, 교장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사장 눈치를 보고 사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날 집회는 왜 사학법개혁이 필요한가를 행동으로 잘 보여준다.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은 재벌, 전경련 등 재계가 최근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기업도시’ 건설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고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긍정적인 답을 한 것이다. 전경련 등은 현재 토지공사나 지방자치단체가 갖고 있는 토지수용권을 민간기업에도 주고 기업이 조성한 토지의 처분가격과 방법을 자율화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대해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은 기업이 요구하는 100% 토지수용권을 줄 수는 없지만 개발 대상 토지를 50% 협의매수하는 경우 나머지에 대해서는 강제수용권을 부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 동안 전경련 등 재계는 좌파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노무현 정부에 대해 좌파라고 비판하고, 좌파라는 증거를 대라고 하면 정부의 경제 규제 및 개입 등을 논거로 제시해 왔다.그러던 재계가 다른 것도 아니고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강제수용권을 달라고 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기업에 그토록 많은 토지 강제수용권을 주는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입만 열면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의 신성함, 정부 규제의 폐해를 주장해 온 전경련과 재계가 토지 강제수용권을 달라니…. 이 나라를, 예를 들어 ‘용인은 삼성 사회주의 공화국’, ‘청주는 LG 사회주의 공화국’과 같이 재벌 사회주의(기업도시) 공화국들로 분할하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소위 참여정부라는 정부가 이러한 요구를 절충적이지만 수용하겠다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재벌사회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적 코미디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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