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지속돼 온 화폐개혁 논의가 현실화되고 있다. 연초 한국은행 총재의 제안으로 시작된 디노미네이션 논의는 경제 여건상 시기상조라는 재정경제부의 방침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최근 정부 방침의 변화로 구체적인 시행 시기와 방법이 논의되고 있다. 정치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이미 10만원권 발행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화폐기본법안이 발의되었고 정부와 정치권, 재계 등은 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에 대해 합의, 공론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은 본래 화폐나 채권, 주식 등의 액면금액과 명칭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통화단위를 절하하거나 동시에 명칭을 변경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우리 화폐는 ‘원화’라는 명칭으로 이미 디노미네이션 되어 있으므로 현재의 원화를 100분의 1 혹은 1,000분의 1로 축소하고 명칭을 변경하려는 현재의 움직임은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다.
경제순환의 기본이 되는 통화의 단위가 국가의 경제 규모에 부적합할 경우 많은 비용이 발생하고 효율성이 저해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화폐단위를 변경해야 할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처음 1만원권이 도입된 1973년 당시 40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현재 1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한때 최고액권이었던 1만원권 지폐는 이미 고액권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고 10만원권 수표의 사용은 고액권의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화폐개혁의 필요성은 무엇보다 지나치게 높은 숫자를 처리해야 하는 회계적 비용과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 경제 규모 증가에 따른 천문학적 단위 사용을 피함으로써 각종 회계장부의 기장과 일상생활에서 거래 편의를 높일 수 있고 수표 사용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비용의 감소도 큰 이점이다.10만원권 수표 발행 규모는 95년 7억4,000만 장에서 2003년 8억1,000만 장으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고 발행비용만 연간 6,000억 원이 소요되고 있다. 여기에 관리ㆍ유통비까지 포함하면 연간 약 1조 원의 비용이 든다. 이를 고액권으로 대체하면 연간 500억 원 이내로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최고액권의 평균은 18만 원대로 달러화에 대한 교환비율이 4자릿수인 통화는 드물다. 수출입 규모로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 경제 규모로 볼 때 화폐의 대외적 위상을 높일 당위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화폐개혁으로 인한 문제점도 간과할 수 없다. 우선 새로운 화폐를 제조할 때 드는 직접적 비용은 물론 새 화폐가 유통됨에 따라 기존의 처리 시스템을 변경해야 하는 간접적 비용이 매우 클 것이다. 우수리 단위 절하에 따른 물가상승 가능성과 더불어 화폐변경에 따른 불안심리 가중으로 발생할 혼란도 예상된다.본래 디노미네이션은 모든 금액이 일률적으로 단위가 바뀌는 것에 불과하므로 금융, 실물자산 등의 실질 변수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자기실현적 측면을 고려할 경우 경제주체들의 혼란에 따른 여파를 간과할 수도 없다. 더욱이 현재 우리 경제는 과도한 물가 상승과 경제주체들의 불안심리 가중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부작용은 더욱 크게 부각된다.
현 경제 규모에 맞지 않는 화폐단위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나 그 시행 방법과 시기, 절차 등에 있어서는 철저한 논의가 요구된다. 잦은 정부 방침의 변경과 반(反)시장적 정책 등에 따른 불확실성의 증가로 경제주체들은 시장기구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어떠한 경제 정책도 시장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시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하현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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